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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Nov 29. 2021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그 집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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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가 눈이 멎었습니다.

무심히 읽어 내려가던 긴 시 끝에 한 문장에서

눈이 멎고

숨도 멈추었습니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노 시인의 한 마디 문장이

뭐랄 것도 없이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손 안에는,

발 밑에는

그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야 편안한 것을 말입니다.

결국은 그리 버리고 가는데 말입니다.

무엇을 쥐려 했는지,

무엇을 들고 가려 했는지,

자고 나면 손끝이 그리 저린 건, 세월 탓이 아니라, 아직도 움켜쥐고 싶은 그 무엇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겠지요.

시인의 한 문장이 허정거리는 손짓을 멈추게 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리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어느 바람  좋은 날,

하늘에 보름달 짙은 어느 날,

그리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한 번, 비움을 생각하게 하는 날입니다.

몸도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그리 또 한 번 비워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평화로운 하루를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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