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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Dec 30. 2021

벼루를 닦아내며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한 해 동안 붓에 먹을 묻히고 글을 쓰다 보니, 책상 위가 채 정리되지 못한 채 한쪽으로 밀어 놓은 화선지며 벼루 등으로 어수선합니다.


'명창정궤 明窓淨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밝은 창에 깨끗한 책상이라는 뜻으로 서재가 깨끗한 모양을 말하는 단어이죠.

명창정궤에 좋은 붓 하나면 더할 나위가 없다던 소동파는 아니더라도 이 단어를 생각하며 정리를 해 봅니다.


밝은 창이야 비추는 햇빛이 알아서 할 일이니 나는 책상이나 깨끗하게 정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일이 제법 커져 반나절이 지나서야 얼추 책상이 정리되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리된 책상을 보는 마음은 개운합니다.


책상 한 편으로 가지런히 놓인 붓과 함께 그동안 쓰던 벼루가 보입니다.

제가 쓰는 벼루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각형 돌판의 모양이 아니라, 질그릇 모양의 투박한 그릇입니다.

언젠가 구경삼아 갔던 어느 시골의 도예공방에서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작은 그릇인데, 만들고 보니 벼루로 쓰기 딱 좋아 그렇게 놓고 쓰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쓴 벼루는 이곳저곳에 먹이 묻어 그간의 붓과 씨름한 흔적이 가득합니다.

문득 벼루를 닦고 싶어 졌습니다.

삼천갑자 동박삭이 숯을 냇물에 씻는 저승사자를 비웃다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도 먹물 가득한 벼루를 씻어 봅니다.


물을 틀어 내려 가장자리에 굳어 단단하게 자리 잡은 먹을 긁어내고 닦아냅니다. 한동안 먹물을 흘려내니 검은 먹을 뒤집어쓴 채 한 해를 함께했던 벼루가, 잘 구워졌던 청록색의 본래의 색을 보여줍니다.

아, 이 벼루가 이런 색이었네요.


잘 닦아 말끔해진 벼루를 책상에 놓으니 '명창정궤'의 마침표를 찍은 듯 개운합니다.


벼루를 닦으며, 나의 한 해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깨끗했던 벼루에 먹의 흔적이 묻어 벼루의 색이 감춰지듯, 나의 마음에도 매일매일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한 해동안 묻고 그을리고, 딱지가 되어 붙어있었겠지요.


매일의 티끌 같은 교만과, 먼지 같은 욕심과, 끈적이는 게으름들이 내 마음 한 구석에 붙어 단단한 껍질을 이뤘는지도 모릅니다.

그 껍질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빛을 가리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내 마음을 더 작게 만들었을지도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벼루를 닦는 마음으로, 내 마음도 닦아내 볼까 합니다.

내 마음의 창도 닦아보고, 내 마음에 가득한 티끌과 먼지들을 닦아내고 털어내 봐야 하겠습니다.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마음들도 차근히 정리해서 곧 다가 올 새해는 그렇게 정돈된 마음에 하얀 화선지 한 장 펴놓아 볼까 합니다.

새해에 쓰일 희망들을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벼루를 닦아내며 마음속 티끌도 걷어내 보는 하루였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희망찬 새해를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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