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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Aug 02. 2022

사과꽃 한송이 떨어졌던가 -박규리

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아무도 없는 산중 느닷없는 소낙비에 흠뻑 젖어 나타난 사람

툇마루에 앉아 함께 젖는 추녀 끝만 쳐다보던 사람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흔들리는 제 마음이더라며 삶의 고단한 체증맺힌 명치끝만 쓰리게 쓰다듬던 사람

밤낮으로 취한 세상은 부옇기만한데 내가 흐르는지 세상이 내 속을 흐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던 사람

조용히 두 손을 오래 부비던 사람

출렁이는 가슴은 밤마다 넘쳐흐르고, 돌아보면 눈물 아니면 살 수 없지만 누구 한번 모질게 원망은 한 적 없다던 사람

이제라도 술 끊고 사람답게 살아봐야겠다며 쓸쓸히 웃던 사람,


때마침 사과꽃 한송이 떨어졌던가……


빗물에 흩어지는 사과꽃잎만 눈 시리게 바라보던 사람

앞산 이마에 노을이 지고, 노을에 젖은 낡은 오토바이 털털털 다시 몰고 가던 사람

살다 살다 막다른 길마저 잃고 한발 내딛을 허공마저 놓으면, 바로 그때 한번은 죽음으로 튀어오르지 않겠느냐만, 이렇듯 허무하게 스쳐가기 위해 몇 생을 내가 기다려왔을지도 모를 사람,


며칠이나 지났다고…… 사과꽃 채 지기도 전에, 두 눈 뜬 내 앞에, 느닷없는 영정으로 오다니…… 사과꽃보다 더 붉은 그대 깊은 등(燈)으로 오호, 이제서야 내게 온, 이 무정한 사람


사과꽃 한송이 떨어졌던가 / 박규리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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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지나갔다 하고 그 빈자리엔 비구름이 가득 몰려옵니다.

밀려온 구름들이 채워지며 빗방울을 종일 뿌려주는 오늘입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박규리 시인의 '사과꽃 한 송이 떨어졌던가'를 읽어봅니다.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장면처럼, 그 사람이 그 삶이 그 사랑이 보이는듯합니다.

박규리 시인의 시는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모든 시의 서사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줍니다.

미처 보지 못한 이야기는 상상을 하고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는 기대하게 합니다.


비는 내리고 빗물에 사과꽃은 흠뻑 젖는 날입니다.

꽃도 젖고

마음도 젖고

당신도 젖고

나도 젖는

사과꽃 한 송이 떨어지는 날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평화로운 시간을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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