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시 -김경근

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by 사노라면

운율이 안 맞으면

시가 아니란다

상투적인 단어로는

시가 안된단다


꼬장꼬장 서슬 퍼런 시인님의 시집을

조용히

저 높은 책장에 꽂아 넣는다


그래야만 시라면

철학을 담아야만 시라면

슬그머니 펼쳐보는

내 시는 똥 시인가 보다


화려한 운율의 귀하신 시구절들은

책장에서 반짝이게 모셔두고

내 똥 시는 거름으로 쓰자


화단에도 뿌리고

내 마음에도 뿌려

똥 시는 똥 시답게

거름으로나 쓰자

똥 시가 거름이 되고

그 거름으로 내 마음이나 키우자

햇볕 쬐고 비 적시고

벌레 오고 새도 오게

똥 시 거름 먹고

마음에 꽃 한 송이 자라게


똥 시 - 김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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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내들었습니다.

여러 시인들의 고운 시들을 모아 그분들의 단상과 함께 엮은 책입니다.

다양한 시풍과 다양한 시선을 경험할 수 있어 이런 종류의 편집 시집도 좋아합니다


책을 읽다가 어느 시평에서 눈이 멈춥니다.

본인의 시에 대한 자평인데, 시는 그러해야 한답니다.

운율도 맞아야 하고, 상투적인 단어는 쓰지도 말고,

시에 고귀한 뜻이 담여야 한답니다.

요즘엔 어설픈 시도 많은데, 시는 이러해야 한답니다


슬그머니 책을 덮고 책장에 다시 꽂아둡니다.

나의 오독 誤讀일 수도 있고

나의 곡해일 수도 있습니다만

나를 보고 한 말도 아니었지만,

갓 쓰고 에헴 하는 어르신이 오버랩 됩니다


시를 다듬던 붓 끝이 괜스레 거칠어집니다

시도 아닌 시를 쓰던 붓 끝에 미안해집니다.

그러다 생각합니다.

'그래, 세상 어느 구석에 똥 시라도 있어야

거름이 되고 영양이 돼서

어느 하늘 아래 꽃이라도 하나 피우겠지'


마음을 추스르고 똥 시 한 줄 끄적여 봅니다

다 지은 똥 시 한 줄.

내 마음 밭에 뿌려보는 오늘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엔 평화의 시가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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