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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Sep 23. 2019

바람 부는 성산포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제주에 내려와서 사흘 동안은 정말 화창한 하늘이었습니다.
현지인들조차 드문 날씨라 할 정도로 쨍하게 푸른 날이었습니다.
놀멍 하늘 보고 쉬멍 바다 보니
눈에 가득 제주가 꽉 차있었습니다

그러다 태풍이 지나가는 일요일은 그 태풍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태풍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고
태풍이 온 게 느껴지고
태풍이 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태어나서 이렇게 태풍의 한 복판에 있었던 게 몇 번이나 있을까 싶었습니다.
또 한 번의 좋은 경함을 했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숙소에 있느라고 꼼지락거리며
이게 우리 집 일요일인지 제주의 일요일인지 분간할 수 없이 빈둥거리며 붓만 들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피부로 맞는 태풍은 대단했습니다.

제주에 오면 성산포를 가볼까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여서 자주 그려보았던, 정호승 님의 '문득'이란 시를 생각하며 성산포 앞바다를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성산포 앞바다를 같이 걸었던 그대는 없지만
정호승 님의 그 성산포를 보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하늘 낮게, 비 오는 성산포 앞바다는 더 운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찾아나간 성산포에선, 태풍 덕분에 비바람만 쫄딱 맞았습니다.
바람에 머리 날리고,
빗물에 눈앞이 뿌옇게 돼서,
보고 싶다는 전화 한 통화의 감성은 엄두도 나지 않는 그런 성산포였습니다.

역시 그리운 것도 , 사랑하는 것도, 보고 싶은 것도, 감성 충만한 것도 다 등 따시고 배불러야 나오는 생각이라는 진리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독자분들 중 짝꿍이 전화도 없고, 보고 싶다 사랑한다 안 해서 서운하고 아쉬운 분들, 등 따시고 배부르게 먹이고 재워보세요. 아마 바로 효과 있을 겁니다.
그리해도 반응 없다면 태풍 부는 성산포로 보내보세요.
비바람에 정신 좀 차리라 말이죠^^

태풍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바람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비바람이 지난 자리엔 부러진 가지와
뒤집어진 흙탕물이 남겠지만
어쩌면 자연은
그렇게 약한 잔가지는 치워지고
고인물도 한번 뒤집힐 때도 필요할 지도요.

우리네 삶도 그럴까요
그렇게 태풍 지나간 후처럼
가끔은 마음 한번 뒤집음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아픈 상처는 아물고
주저앉은 다리에 힘을 넣어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나
고개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볼 용기를 갖게 말이죠.

세상 모든 이들의 용기와 평화를 기원합니다
태풍에 피해 없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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