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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Sep 27. 2019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 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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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을 그려봅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제야 우리는 젊음을 돌아봅니다.
부끄러움의, 회한의 숨을 쉬며
그렇게 젊음을 돌아봅니다.

자신감과 희망뿐 아니라
자기 연민과 열등감과 절망이  함께하던 젊은 시절입니다
그 역동의 젊음을 헤어나가던 동력은
어쩌면 질투의 힘이었을지도요.

기성에 대한 질투와
달리는 자들에 대한 질투와
가진 자들에 대한 질투와
완성된 사랑에 대한 질투와
하늘 아래 희망에 대한 질투로 태워버린 나날 들이었을지도요.

그 젊음을 돌아보는 시절에 후회하는 건,
'미친 듯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정작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젊은 시절뿐일까요.
아직도 내 앞에 선 나를 물끄러미 마주 보며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어가며
스러지기 전,
부끄러움으로 짙은 화장을 한 나에게
오늘은 사랑한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부끄러움이 세상을 덮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함조차
부끄러움이 되지 않은 요즘.
그 부끄러운 하늘 아래
그 부끄러운 얼굴로
부끄럽게 마주한 나 자신에게
오늘은 사랑한다 말 건네 보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평화로운 마주함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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