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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정지용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by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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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수(鄕 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섭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거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옯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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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 준비를 합니다.
아파트 생활을 하다가 작은 단독주택으로 옮겨오면서
알게 모르게 자연의 기쁨을 느끼고 누리게 해 주던 이 곳이었는데, 다시 아파트로 옮기게 되니 가기도 전에 벌써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한편으로는 번잡스러운 수고에서 벗어나는 편리함도 기대는 되긴 하지만,
봄 여름 꽃들 사이를 누비는 벌과 나비의 모습,
햇빛 가득한 앞 마루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의 평화로움,
싱그런 초록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해주던 새들의 소리,
짙은 어둠의 밤, 쏟아져 내리던 별들의 이야기가 그리울 듯합니다.

짐을 정리해야 할 번잡스러움과 어수선함을 앞에 둔 채
정지용의 향수를 그려봅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가곡으로도,
이 가을에 어울리는 시구절로도 자주 불려지는 멋진 시입니다.

구절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고향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서울 토박이인 저로서는 이런 향수의 모습은 없지만,
지금의 단독 주택의 모습이 얼핏 얼핏 그리워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리운 고향은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을은 울음을 우는 곳일진대,
정작 짐 싸는데 게으름 피우고 깬동거리는건 황소가 아니라 나의 모습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속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몽실몽실 피어나는 오늘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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