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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03. 2023

거북한 단어 부락

사용하지 않음이 좋습니다

‘정다운 우리 부락’ 같이 일부 농촌 마을에서는 부락部落이라는 말을 아직도 사용합니다. 일반인도 농촌 마을을 부락이라 부르는데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듯합니다. 현대표준국어대사전에서 조차 부락을 ‘시골에서 여러 민가가 모여 이룬 마을. 또는 그 마을을 이룬 곳. 마을로 순화”라 정의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부락이라는 말은 ‘부라쿠’라 발음하는 일본말로, 일제 강점기 시대 치밀한 조선 천대 전략의 산물입니다. 일본 역시 사농공상士農工商(한국의 士는 선비, 일본은 무사를 의미)의 계급 사회였습니다. 다만 공상의 위치가 조선보다는 좀 높았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부와 권력은 농토에서 나왔습니다. 농이 공상에 앞선다고는 하지만 생활은 팍팍하여 항상 민란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지배 권력은 일반 백성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사농공상 아래에 에타穢多와 히닌非人으로 불리는 최하층 천민을 두었는데 거기에도 또 상하가 있어 에타가 히닌보다는 조금 더 위에 위치했습니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을 부라쿠, 곧 부락이라 불렀고 부락에 사는 사람을 부락민部落民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졸지에 조선의 마을은 부락이 되어 천민촌이 되었고 백성은 부락민이 되어 천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1958년4월에 촬영된 대도시내 부락.  (출처 : 사단법인 부락해방·인권연구소  blhrri.org)

에타는 백정, 동물의 해체, 가죽 가공 같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누구도 선뜻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이었고, 히닌은 한자 그대로 사람이 아닌 괴물 취급을 받으며 사형장 같은 곳에서 일하거나 일반인이 할 수 없는 재주를 부리는 광대나 기인으로 일했습니다. 이 신분은 세습되어 소속 부락을 떠날 수 없었고, 마을을 벗어났다가 잡히면 사형을 면치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천민 신분은 현대 일본에까지 이어져 부락 해방운동이 일어나고 법으로 천민 차별을 금지했을 정도였습니다.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375126&cid=51293&categoryId=51293)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며 조선의 마을을 부락이라 칭한 것은 모든 조선 백성을 에타와 히닌 같은 천민으로 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락이란 용어가 워낙 오랫동안 농촌 마을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굳어지다 보니 현대 국어사전조차도 농촌 마을을 지칭하는 명칭의 한가지로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은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서도 점령지의 마을에 부락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민을 천민화, 마을을 천민촌화 했습니다. 

(출처 : https://cafe.naver.com/idiolle/973569?art=ZXh0ZXJuYWwtc2VydmljZS1uYXZlci1z)

일본은 ‘나’, ‘우리’라는 의식이 강해서 ‘나와 다름’, ‘우리와 같지 않음’에 대해 강한 배타성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부락민, 이주 난민, 유색인 외국인, 아이누족에 대해 얼마나 심한 차별을 했는지 일본 내부적으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을 정도입니다. 이 차별에는 재일 한국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의 ‘쪽바리’란 표현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반면 일본의 한국 하대 표현 ‘센징’이란 용어는 여전히 살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울한 한일 정서입니다. 근대에 들어 부락은 도시 빈곤과 범죄, 슬럼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까지 인권 차원에서 접근한 많은 연구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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