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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계절산타 Feb 15. 2021

연필로 쓰기(김훈, 2019)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정말 다른 생각과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확인하게 되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경이롭게 느껴진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런 경이로움을 경험한다. 구체적인 사건과 깊은 사유가 만나 만들어 낸 에세이를 읽는 기쁨이란....


'단어'하나하나, '조사'하나하나, '글 부호'하나하나까지도 허투루 쓰지 않기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 선생의 글은 날카로운 면도날과 닮아 있다. 스윽 스쳐가고 나면 서릿바람은 느끼지만 아프지는 않고, 곧 있으면 방울 방물 피가 맺히고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아파오기 시작한다. 


오늘 소개하는 '연필로 쓰기'(김훈, 2019, 문학동네)라는 책은 책 표지를 보고 있으면 안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연필을 들고 있는 김훈의 모습과 김훈의 글씨체, 그리고 강력한 한 문장!  "나는 겨우 쓴다"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알림'이라는 짧은 글을 읽으면서 에세이의 원형(?)이라고 전해지는 몽테뉴의 수상록의 서문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연필로 쓰기'와 '수상록'의 서문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김훈과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성실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중략)...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해둔다. 추호도 그대에게 봉사하거나 내 영광을 도모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는 몽테뉴... 묘하게 닮았다!


에세이는 늘 읽는 그 날의 나의 상태와 연관되어 가볍게도 무겁게도 읽히는 법이라, 어떤 글이 어떤 상태에서 읽혔다고 낱낱이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나이 들어 절벽과 마주한 김훈이 '늙기'의 기쁨을 느끼고 형용사의 세계로서의 '늙기'를 글로 표현한 부분은 특히 좋았다.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난 짓 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중략)... 이보다 더 슬픈 일은 그 악업과 몽매를 상쇄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절벽과 마주한다...(중략)...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연필로 쓰기, 김훈, 2020, 전자책)


글 하나하나가 다 좋다. 다만 시간을 좀 가지고 꼭꼭 씹어 읽으면 더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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