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또박또박'을 알려준 만년필
나에게 버림받았다가 다시 돌아온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만년필이 있다. 어느 날 부드럽고 낭창거리는 연성(軟性) 만년필 촉(닙 nib)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부드럽고 낭창낭창하면서 필압에 따라 획의 굵기를 조정할 수 있는 연성 닙을 장착한 만년필을 가지고 싶었다. 알아보니 연성 닙은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에서 많이 확인되었고, 구하기도 어려웠고 설사 구한다고 한들 잘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연성 닙에 대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에 들어온 녀석이 바로 '파이롯트 커스텀 742 FA(PILOT Custom 742 FA)'였다. 딱히 구할 방법이 없어 만년필 관련 카페에서 수소문을 했고, 나는 드디어 만년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벌써 10년여 년 전인 것 같다. 받자마자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쓰는데,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 필압과 파지법, 속도에 따라 잉크의 흐름이 자주 끊겨 일상에서 실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구했지만, 나는 다시 만년필 카페에서 재분양을 했다.
운명이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 4년 전 일본으로 놀러 갔다가 긴자에 있는 이토야 문구점에서 다시 이 녀석을 보게 되었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구입을 했다. 이번에는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이롯트는 1918년 창립되었고, 창립 74주년이 되는 1992년 커스텀 74 시리즈를 만들었다. '파이롯트 커스텀 742'의 74는 창립 74주년이라는 뜻이고, 2는 2만 엔대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년필 촉은 14K 금촉을 쓰고 있다. 파이롯트 커스텀 74 시리즈(74, 742, 743) 모두 금촉이다.
흔히 만년필 닙은 EF, F, M 등 몇 가지 안 되는 종류로 생각되는 것에 비해, 파이롯트 커스텀 742는 EF, F, SF, FM, SFM, M, SM, B, BB, C, MS, PO, FA, WA, SU 등 아주 다양한 닙을 생산하고 있다.
FA는 특수한 닙으로 붓처럼 쓸 수 있고 극강의 소프트함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만년필 촉들과 비교해 봐도 한눈에 생긴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A 닙의 모양이 워낙 독특해서,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생긴 모양 때문에 오징어 닙이라고 부리기도 한다. 필압을 주었을 때 닙이 부드럽게 잘 벌어지게 하기 위해서 모양을 이렇게 만든 것 같다.
쓰는 재미를 톡톡히 선사하는 만년필이다. 이 만년필은 "천천히, 또박또박" 그리고 "부드럽게"를 실천하게 만드는 펜이다. 10여 년 전보다 내 삶이 좀 여유로워졌는지 요즘은 잉크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잘 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