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계절산타 Mar 21. 2021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황현산, 2018)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내 독서생활에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는 분이 있다. 황현산(黃鉉産, 1945년 6월 17일~2018년 8월 8일). 나에게 문학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 준 분이다.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2013, 난다)라는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날카로운 면도칼에 베였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자. 쓰윽 스친 서늘한 느낌이 들어 얼른 베인 곳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다. 시간이 좀 지나면 베인 곳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아프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글이 그랬다. 차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글인데, 격랑을 불러일으키고 추한 민낯을 마주하게 만든다. 참 많이도 선생님의 책을 추천하고 읽어 보라고 권했던 것 같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으면 더 좋아요. 단어 하나하나를 읽는데 시간을 다른 책 보다 많이 써 보세요'.... 하면서...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이후, 5년만 2018년에 선생님의 새로운 산문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이 소개되면서 언론에서는 선생님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새로운 산문집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은 세상을 떠났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황현산, 2018, 난다)은 선생님이 서문을 직접 쓴 마지막 책이 되었다. 



한겨레신문 : 세상과 이별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남긴 문장들 (2018년 8월 8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56741.html



이 책은 글의 시간으로 보면 2013년 3월 9일부터 2017년 12월 23일까지를 담았고, 세월호 참사, 대통령 탄핵 등의 굵직한 사건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제나 그랬듯, 흥분하지 않고 조곤조곤 우리에게 '사소한 부탁'을 하듯 글이 전개된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중에서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중에서)


이 책은 서문의 글 그대로 나에게 문학적 시간, 역사적 시간, 미학적 시간, 은혜의 시간, 깨우침의 시간을 주는 책이었다. 같은 시간을 사는 줄 알았는데, 다른 시간이 너무도 많았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중에서

아마도 제목은 이 부분에서 따온 것 같은데, 정말 멋진 제목이 되었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중에서

줄을 쳐 둔 곳이 너무 많다. 의미 있는 문장이라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장이라,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등등... 이 책은 '우리를 다 바쳐서' 읽었으면 좋겠다. 새사람까지는 모르겠지만, 갑자지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의문이 드는 문학적 시간을 만날 것이다.


혹시 '밤이 선생이다'를 안 읽은 사람이라면, 먼저 읽고 읽어도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200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