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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계절산타 Apr 10. 2021

이름 없는 빈티지 만년필

이탈리아 볼로냐의 추억을 머금고 있다.

해외를 나가면 꼭 가 보는 곳이 있다. 문구점 혹은 만년필 샵이다. 한국에도 아주 드물게 만년필 샵이 있지만, 만년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는 동네마다 꼭 한 군데씩은 오래된 만년필 샵이 있다. 국제아동도서전을 개최하는 도시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 볼로냐를 갔을 때도 만년필 샵이 있었다. 오래된 만년필 샵의 매력은 만년필을 무지하게 애정 하는 나이 지긋한 주인장이 계시다는 것과 지금은 단종되어 만날 수 없는 특이하고 오래된 만년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볼로냐를 찾았을 당시 찾았던 만년필 샵과 주인 어르신이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그때는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쉽다 - 동양에서 만년필이 좋아 찾아온 나를 어르신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빈티지 만년필을 보여 달라고 했고, 어르신은 서랍 곳곳을 뒤져서 만년필 여러 개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잉크를 주입하여 직접 시필도 하게 해 주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난 만년필이 바로 이 친구다. 제조사가 어딘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자태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만년필 캡을 열어도 만년필 촉은 보이지 않는다. 만년필 상단의 노브를 트위스트해야 만년필 촉이 나타난다. 만년필 촉과 바디는 18k로 만들어졌다. 섬세한 빗살 문양의 바디와 단순하지만 우아한 닙이 인상적이다.

세월의 흔적이 있는 닙이지만, 아직까지 생생하게 잘 나온다. 만년필 장인인 주인장께서 내게 만년필을 넘겨줄 때 하나하나 다 점검했고 닙 조정까지 해 주었다. 잉크는 만년필 촉을 집어넣은 상태에서 닙 파트에 직접 잉크를 주입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렇게 주입된 잉크는 새지 않고, 배럴과 피드에 딱 묻어 있다.

오래간만에 잉크를 주입하고  봤는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고  나온다. 닙은 약한 연성의 느낌이 나고, 쫀득하다. 글씨 굵기는 매우 가늘게 나온다. 잉크의 흐름이 엄청나게 좋지는 않지적절하게 잉크를 뱉어 낸다.


이탈리아 볼로냐를 기억하는 일에 이 만년필만큼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코로나 19가 극복되면 꼭 다시 이 만년필 샵에 가고 싶다. 그리고 어르신을 꼭 보고 싶다. 건강하시겠지!! 그때 다시 이 만년필을 들고 가서 점검을 받아봐야겠다.


들고 니면서 필기하기에는 여러 부담이 있지만 -가장  부담은 혹시라도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하하는 것이다 - 아주 가끔 꺼내서 추억을 되새김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지만, 삶을 아주 풍부하게 만드는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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