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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계절산타 Apr 13. 2021

공감의 배신(폴 블룸, 2019)

공감에는 넓이가 필요하다.

동정(sympathy) 공감(empathy) 정말   차이이다. 타인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비슷하나, 동정은 맥락적 이해나 입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저 쯧쯧 하는 수준 정도이다. 동정은 대체로 구체적인 행동도 따르지 못한다. 그래서 동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다.


반면 공감은 타인인 처한 상황과 감정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을 타인의 위치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구체적인 행동이 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공감을 받았다는 느낌은 참 좋다.


공감은 차이가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는 혐오를 극복하는 일에서, 혹은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그리고 사람들 간의 뭔지 모를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감형 인간을 만들겠다는 사회적 혁신가도 있으니 분명 공감에는 순기능이 있다.


공감이 그럼 과연 좋기만 할까? 공감의 역기능은 없을까? 공감에 작정하고 안티를 선언한 ‘공감의 배신, ( 불룸, 2019, 시공)이라는 책이 있다. 공감이 많은 문제 해결의 묘안으로 떠 오르고 있는 이때 공감의 실체를 종합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라고 일갈하면서 책은 시작된다. 공감이 오히려 어리석은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차별과 배제와 잔인함의 원천이 되기도 한단다.

다양한 심리실험과 사례를 통해 공감이 우리를 어떻게 배신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공감이 오히려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충격적인 결과도 소개한다. 통제된 실험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내용이지만 꽤 충격적인 내용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공감을 반대한다는 것을 저자는 명확히 하고 있지만, 살짝 공감의 필요성이나 순기능도 언급하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


공감에는 넓이와 깊이가 있다.  둘은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처럼 상충된다. 깊은 공감은 강한 행동력을 지니게 하지만 매우 선택적으로 작동될  있다. ‘우리가 남이가같은 비이성적 언사를 남발하게   있다. 반면, 넓은 공감은 즉각적이고 심도 깊은 행동력은 적게 나타날 수 있지만 다양성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이 있다.


공감은 깊이의 차원보다 넓이차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책은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공감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은 공감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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