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길버트 그레이프」를 보고.
1993, 라세 할스트롬 감독
조니 뎁,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 (개인 별점 5/5)
'상수'이기를 기대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 주위에는 그가 상수이길 바라는 삶의 무게들이 얽혀 있다.
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선호하는 영화 스타일은 프레임 안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카메라 뒤의 시선을 필름에 조용히 담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부분은 영화가 갖는 의미 중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많고 많은 삶, 다양하고 있을 법한, 그런 삶을 얇고 섬세하게 저며내어 보여주는 영화를 보면, 숨이 착 가라앉으며 내일을 위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세상의 큰 흐름에 몸을 맡긴 듯 담담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길버트 그레이프」역시 그런 종류의 필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중간 지점까지의 내용을 조금 누설하오니, 온전한 영화 감상을 원하시는 분은 다음에 다시 찾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길버트는 가족들을 부양합니다. 자신의 삶은 그저 가족의 삶을 위한 것일 뿐인 듯 보입니다.
초 고도비만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 어린 동생들. 돌아가신 아버지의 커다란 빈자리는 그대로 가족들을 짓누르는 투명한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트에서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심지어 동네 유부녀의 외로움을 달래주게 되는 관계에도 얽힙니다.
그녀가 말하길, 길버트는 떠날 것 같지 않아서라나.
그러던 와중, 캠핑카를 타고 다니는 여자 하나가 길버트와 만나게 됩니다.
차가 고장나서 수리하는 동안 길버트네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되죠.
이 캠핑카를 타고다니는 모녀는 집에 매여 있는 길버트의 처지와 대조됩니다.
길버트의 아버지는 집의 지하실에서 목을 매었습니다. '지하실'은 '집'이 서있는 그 근간이자 굴레입니다. 그리고 길버트에게 박힌 말뚝같은 공간입니다.
길버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며 그 '집'에서 가족들을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 몸이 비대해진 어머니 마저 집에서 움직이지 못하기에, 길버트에게는 집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가득합니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에게 있어 변치 않는 상수이길 원합니다. 야속하게도 누구를 탓할 수가 없는 것이, 저마다의 처량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서 비롯된 길버트를 향한 구속은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서로의 힘을 앗아갑니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요, 길버트는.
그런 그에게는 동생 어니가 있습니다.
어니는 심한 자폐증을 앓으며 예측할 수 없는 사고들을 치는데 바쁩니다. '아차'하면 어디론가 달려나가 부서지기 가장 쉬운 아이기에, 길버트는 한시도 그를 놓아둘 수 없습니다.
통제할 수 있는 듯 하다가도 그렇지 않고. 예상할 수 있는 듯 하다가, 또 무언가를 망쳐버립니다.
길버트는 어니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런 어니는 길버트에게 변수일까요 상수일까요. 저는 random error 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예상 밖으로, 닻 같이 무겁던 어니의 존재가 변할 것 같지 않던 길버트의 삶의 공식이 변화할 계기를 가져다 줍니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길버트는 주위의 기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좋은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좀 나아질까요. 그렇다면 상황이 나아진다는 건 뭘까요?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날 좋아해주니 마냥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괴롭고 답답합니다.
주어져버린 환경과 사람들이 투사하는 역할과 모습이 나를 옭아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씩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가끔 좋은 사람이 되고픈 시도에서 시작하는 타인과의 갈등때문에 이런 생각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냥 좋기만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더라도 이래서야 무슨 소용일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가 내 피부를 밀고 들어오면 우리는 움츠러들며 작아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간과 경험이 안에 쌓여 점점 그것들을 밀어낼 수 있게 되고, 그 표면의 밸런스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저 모두에게 좋기만 한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님의 말을 빌려봅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말라. 욕망의 주인이 되어라.'
과연 길버트는 타인의 욕망을 훌훌 털게 될 수 있을까요?불행인지 다행인지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그 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를 지켜보며 공감하는 영화적 재미도 있고, 그의 처지를 나 자신에게 투영해보거나, 그로부터 시작해 개인적인 상념을 시작할 계기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인생에 한 번쯤 시간내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영화「길버트 그레이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