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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은 Feb 24. 2024

길 위의 생각들

제주 올레길 7코스

올레길 7코스

230706

기상과 동시에 느껴지는 온몸의 비명 덕분에 웨이트 대신 집어 고른 책이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수용체 단백질
몸속 어떤 세포든 최초로 접촉하는 부분은 수용체 단백질이다. 수용체 단백질은 외부 환경의 변화, 예를 들어 혈당의 갑작스러운 증가 같은 현상을 감지한 뒤, 세포 속 다른 단백질들에 신호를 내려보내서 더 많은 과정이 일어나도록 유도한다. 마치 집단에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 즉 누군가가 불쾌함을 느끼거나 논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질 때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과 같다. 이들은 의사 결정자는 아니지만 매개자이며, 자신과 비슷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한다.

수용체는 다양한 사회 집단을 쉽게 오가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다양한 무리의 일원이며 여러 집단을 오가며 의사소통한다. MBTI 유형으로는 '열정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삶은 기회로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사건과 정보의 연결점을 매우 빠르게 찾는' ENFP 유형이다. 또는 '따뜻한, 공감 능력이 있는, 민감한, 책임감 있는, 타인의 감정, 요구, 동기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ENFJ 유형으로도 볼 수 있다. 눈치가 빠르고, 사교적 수완이 있는 붙임성 좋은 사람이며,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친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는 데 능숙하다.

-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카밀라 팡)


단백질계의 MBTI 라니. 어쩜 이렇게 흥미로울 수가.

INTP, ENTP, ENFP, INFP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나는, 책을 접어두고 엠비티아이 검사를 다시 했다.

질문에 답하며 INFJ가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어림도 없지.

허나 나를 인팁이라고 소개하기엔 나 스스로도 부적절함을 느끼기에, 부디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백질이 있기를 기대하며 잠시 책을 접어두고 요가를 했다.

짧게 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당최 이 작은 움직임이 어떻게 이토록 힘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한데도, 몸과 마음이 차분해진다.

평소 고강도의 대근육 수축성 운동을 하는 나는 속근육의 활성화와 근육 전반의 이완이 참으로 낯설면서도 꽤나 반갑다.


요가를 마치고 7코스에 오르기 전,

선물 받은 필름카메라에 첫 필름을 장착하기 위해 스틸네거티브카페에 갔다.

필름만 사서 나올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뒷 내용이 꽤 많이도 궁금했나 보다.

@스틸네거티브클럽

수용체 단백질로 분류되는 ENFP, ENFJ에 이어

연결체 단백질인 ESTJ와 ISTP,

키나아제 단백질 ENTP, ENTJ, ESTP

핵 단백질 INFJ, INTJ까지.

연결체 단백질(adaptor protein)에 대한 작가의 통찰에 놀랐다.

ESTJ와 ISTP는 본과 첫 학기 나의 유일했던 친구 두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 I 극 S 극 T 극 P 애인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이외에 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었던 친구는 극강의 ESTJ였다.

나와는 많이 다른 그들을 향한 별다른 이해의 시간은 없었고, 그저 쟤는 저렇구나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이 내가 지켜봐 온 모습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었다.

텍스트를 읽으며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집단에 있어 다양한 형태와 성향의 사람들의 필수적 필요성도 함께.

허나 핵단백질을 끝으로 더 이상의 MBTI에 대한 소개 없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다소 허탈한 마음으로 한참 동안 책을 뒤적이다 길을 나섰다.




올레길 7코스 시작 스탬프를 열 걸음 앞두고 넘어졌다.

무릎이 까져 피가 났지만 어쩌겠어 걸어야지.

헌데 시작부터 다치다니, 걷는 중에 또 넘어지면 그땐 좀 서러울 것 같은데

 묵묵히 걸었다.

초록과 파랑으로 어우러진 예쁜 풍경을 보면 신이 나 노래를 흥얼거릴 법도 한데, 아침을 책과 요가로 맞이해서일까.

다소 쳐진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양된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계속되었다.

어쩌면 책을 읽으며 너무 많은 사람을 떠올려서 혼자 걷는 길이 외로웠을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자연이 이토록 아름답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자기 고백의 욕구를 지닌다. 그렇기에 본인을 보다 쉽게, 선명히 표현할 수 있는 MBTI에 열광한다. “는 글을 봤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INTP의 성향을 지녔으나, 좋아하는 일 앞에서는 ENTP로 보이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에는 ENFP 인, 예술을 이야기하는 순간엔 INFP 그 자체인 나는 무엇으로 나를 표현해야 할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가장 비슷한 단백질은 환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본래 나는 연결체 단백질이나 핵단백질과 더 비슷해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한다.

하지만 적절한 환경에서는, 즉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든지, 내가 전문지식을 가진 주제로 토론할 때면 나는 여느 외향적인 사람 못지않게 아주 훌륭한 키나아제가 될 수 있다.

한 가지 유형만 선택해서 그것만 고수할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 적응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정상이며, 단백질의 행동을 훌륭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문장임을 알렸을 때, 애인은 내 향이 났다며 나의 글이 아님에 놀라워했다. 나 역시 작가와 내가 무척 닮아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끼쳤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나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 다르다는 것을 현저하게 느끼기에,  나는 여전히 나를 그 자체로서 정의하지 못해 간혹 혼란스럽다. 허나 이게 나다. 정해진 역할은 없지만 어느 곳에서든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

나를 타인에게 알릴 분명한 색깔이 없다는 생각에 빠지기 싫어 주제를 바꾸었다.

 ​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내 머릿속 무질서한 아이디어와 생각들을 글로 적어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 즉 엔트로피를 낮추는 행위의 유용성.

자연계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데, 과연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며 나의 유한한 에너지를 소비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파도가 바위를 때린 뒤 부서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쪼그려 앉아서 바라보았다.

다시 나선 올레길 7코스에는 유난히 내리막길이 많았다.

최초의 계획을 따라 역방향으로 걸었다면 꽤나 힘들었겠구나,

여전히 피가 흐르는 무릎을 바라보며 모든 걸음에 집중해 한 걸음씩 조심히 내디뎠다. 문득, 올레길 시작 전에 굉장히 작은 턱에서 헛디뎌 넘어진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던지.

마주치는 걷기 여행자들 중 몇몇이 내 무릎을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실제로도 아팠던 나는 책을 읽고 싶다는 이유로 눈앞의 카페 '유디에이'에 들어갔다.

부디 진심이 잘 전달 되기를

책은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서 프리즘을 제안했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책의 내용을 요약한 뒤 나만의 방식으로 응원의 인사를 전하고 다시 길로 나섰다.

 ​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니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가족, 친구, 애인, 그리고 더는 편지를 보낼 수 없는 사람에게 부치는 우편함. 망설이지 않고 1년 후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애인에게 보내는 우체통에 넣었다.

내가 학기 중에 그토록 힘들어했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현재의 나는 매 순간 살아있음에 대해 고민하고 그 결과로 하루하루를 착실히 쌓아나가는 것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학기 중엔 바쁘다는 이유로 내 삶에서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될 사유의 시간을 포기했다는 것.

그 결과로 제주에 현생으로부터의 도피처와 자유의 쉼터를 마련한 것이다. 1년 후의 내게 삶의 의미를 물으며 편지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나의 진심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비유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나의 진심은 항상 다른 무언가에 빗대어, 포장된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그 포장을 벗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나의 에너지를 가득 쏟아 진심을 전했을 리 없다. 나의 포장이 난해하더라도 그 속을 열어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선물을 취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나는 마음을 쏟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판단 오류이니 별 수 없고.

항상 말의 왜곡 가능성에 대해 걱정한다. 한편으로는 진심은 반드시 통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오늘은 나와 그 친구에 대한 믿음이 훨씬 컸나 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할 때 느껴지는 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을 즐겼다.



어쩌면 나는 지금 프리즘의 반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양한 파장의 빛을 몸소 하나로 모아두고 있다.
타인에게 내 고유의 색을 보일 수 없는 것은
백색광이 두 눈으로 보기엔 너무 눈이 부셔서가 아닐까
감히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심한다.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나의 판단은
놀랍도록 자연의 원칙에 순응하여 계속해서 변화하기에
순간의 생각에 대한 박제를 거부해 왔지만
이제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로써 기록해두려 한다​​

230707, 서귀포의 카페 루디스에서, 가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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