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병이 도졌다. 아놔, 못된 성격 사라진 줄 알았더니 요 며칠 잠을 못 잤다. 세 시간쯤 자고 일어난 금요일 새벽에 갑자기 동태전이 먹고 싶어 졌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으며 지글지글 동태전을 만들었다.
얼린걸 그냥 했더니 비주얼이 영~라디오에서는 이문세의 별밤 이야기부터 친구들끼리 쪽지 주고받고, 행운의 편지를 받았던 이야기, 쫌 한다는 애들은 편지지 가장자리를 태워 꾸미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게스트부터 디제이가 모두 남자였는데(모두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여학생들만의 전유물이 줄 알았던걸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전을 부치다 말고 앨범을 뒤져보니 35년 전 친구 은*이한테 받은 쪽지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은*이에게 보냈다.
은*이와 나는 방송부 활동을 하며 친해졌다. 가요와 팝송을 좋아하던 나와 클래식을 좋아하던 은*이는 서로 보완해가며 잘 지냈다. 하루 종일 봤어도 집에 가면 또 은*이에게 할 말이 있어서 편지를 썼다. 시를 적었고 노래 가사를 적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 당시 유행했던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들을 그려 코팅을 해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고2가 되면서 나는 이웃 학교 남학생들과 미팅을 했고 이웃 도시 대학생들과 미팅을 했다. 대학 축제에 갔다가 친구들과 손잡고 막차를 타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며 은*이는 꽤 많은 걱정이 들어간 편지를 썼고 나는 읽었다. 하교시간이면 교문 앞에 석*이가 와서 기다렸고 가끔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음악다방에 가서 음악 신청을 하고 경양식집에 가서 칼질을 했다. 석*이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 막내아들이었고 나에게 같은 대학 같은 과에 가자고 했다. 난 집에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간다고 했더니 그래도 길이 있을 거라 말했다. 한 학기 방황을 하고 나니 계속하다가는 장학금을 못 받을 지경까지 되었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했기에 다시 공부를 했고 석*이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난 여전히 신경안정제를 먹었고, 별밤을 들으며 공부를 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우리는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은*이가 배우는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가고 싶은 인천 항전 항공운항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냥 비행소녀가 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멋져 보인다고 했더니 은*이는 피식 웃으며 비행소녀가 뭐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십 대를 보내다 멀어졌다. 나는 유아교육과에 진학했고 유치원 교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대학원에 가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4시쯤 퇴근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원장님이 거절하는 바람에 그냥 유치원에 몸 바쳐 일했다. 결혼을 했고 종합학원 원장을 했고 이혼을 했다.
은*이는 가끔 전화를 해서 '연*야! 뭐해?' 묻는다. '그냥 뒹굴지 뭐'하면 '나 30분 뒤면 도착하니까 대충 씻고 거기로 나와!'하고 끊는다. 어느 날 밥을 먹다가 방송부 2년 선배 범*형(우리는 남녀공학을 나왔고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은*이가 밥 먹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범*형과 사귀었던 은*이는 지금도 범*형 집 근처를 지나면 생각이 난다고 했다. 범*형 동생이 말한 거니 맞을 거라 했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오십 대에 십 대 이십 대를 말하며 울고 웃었다.
금요일 저녁에 여직원 3명이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한잔 마시고 어깨가 저리다 했더니 그게 소주 먹는 맛이란다. 나는 박 군의 「한잔해」 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들썩이며 소주를 마셨다. 양쪽에 팔짱을 끼고 재잘재잘 겨울 거리를 걸어 다녔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져서 폴짝 뛰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두 명이 웃었다. 사람이 고팠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자는데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아 노노를 불렀다. '엄마 꿀물 타 줘~'했더니
'엄마 술 마셨었어?'
'으응...ㅎㅎ'
새벽 두시반에 꿀물 마시면서 노노는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에 대해 나는 고3 때 나이트클럽 간 이야기를 했다. '엄만 2년 일찍 학교 갔으니 그때 17살? 너무했네 너무했어'라고 하는 노노의 말을 들어보니 너무한 게 맞았다. 모범생으로만 산 줄 알았는데 미팅도 해보고 나이트클럽도 가봐서 나의 십 대가 덜 아까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꿀물에 얼굴을 담가 놓은 듯 부어 있었다. 출근을 했고 두통약을 먹고 콕콕 속이 찔려서 양배추로 만든 위장약을 먹었다. 아까운 토요일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당분간 소주는 안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