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한 가지 색이 아니더라.

변덕이 죽 끓듯 해도 괜찮아.

by 솔담

8년 전 호주로 이민 간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엄마가 위급하셔서 급하게 나왔고, 나와 문자 한 다음날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잘 지내냐고 물은 내게 잘 지내고 있다!라는 대답은 뭐였을까?

이 때 친구는 한국의 엄마 곁에 있었다.


늘 이 친구가 그리웠다. 한 동네 살다가 친구가 호주로 이민을 가고, 한 달 뒤 나는 P시로 이사를 왔다.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처럼 우리는 아무 때나 지나다 집에 불쑥 찾아가도 괜찮았다. 술 한잔 마신 친구가 '나 데리러 와라!'라고 하면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땐 남편 없는 우리 집이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부스럭부스럭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낸 맥주를 마셨다. 낮에 만나 했던 이야기는 밤에 또 이야기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재잘거리게 했다.


19일 부처님 오신 날에 만나기로 했다. 하룻밤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면 좋으련만 친구는 내가 힘들다며 그날 보자고 했다. 배려에도 서운함이 있다. 이제 좀 마음이 추스러져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안 추스러져도 연락해도 되는데 8년이란 시간이 마음 추스러야만 하는 그런 사이를 만든 걸까?

그래도 뭘 입고 갈까? 마음이 설렌다.


어제 오후 두시쯤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며 '아싸, 신난다. 드라마 보고 영화 보며 놀아야지. 일하고 와서 이렇게 즐기는 게 사는 거 아이겠습니까'

침대에 어정쩡하게 누워 유튜브를 보던 아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엄마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의 아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즐기십시오!'라는 성의 없는 대답을 한 뒤 보던걸 마저 봤다.


무슨 의식이라도 된 듯 샤워를 하고 젤리와 과자가 담긴 상자를 끌어안고 왕대륙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물 마시러 나온 아들은 '또 얘 나오네?'라고 했다. 그렇다, 난 왕대륙을 보기 위해 졸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왕대륙의 미소가 좋다.


안 되겠다 싶어 방으로 들어와 겨우내 입었던 파자마를 벗어던지고 원피스를 입고 누웠다. 다리가 좀 서늘했지만 맨살의 부딪힘이 좋았다.

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이렇게 행복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6시 30분. 낮잠이라 하기에는 늦고 내일까지 자면 억울할 것 같아서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펼쳤다. 환한 형광등 불빛도 소용없었다.

'아들~~~ '하고 불렀더니 잽싸게 달려온 노노에게

'엄마방 불 꺼줘. 너무 졸려. 그런데 내일까지 자면 어떡하지? 아깝다.'는 말이 체 끝나지도 않았는데 불 끄고 방문을 닫고 노노는 가버렸다.


우수관의 물 내려가는 소리에 깨서 휴대폰을 보니 8시다. 하하하! 성공했다.

다시 [사는 게 뭐라고]를 보며 나만 일하기 싫은 게 아니라서 큰 위안을 받았다. 65세되면 시골에 내려가서 쪼그리고 앉아 풀 뽑고 꽃에 물 주는 그런 삶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열심히 근육을 키워야겠지? 일주일에 세 번 라인댄스를 하고 돌아오는 길 달빛 아래서 놀이터에 있는 운동기구에 매달려 열심히 달리는 나를 칭찬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마음 다잡기 위해(아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을 까 봐) 시작했지만 이제는 습관이 돼버린 놀이터에서의 시간. 뭘 하던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누워서 책을 보다 또 '아들~~~'하고 불렀다.

'엄마 배고파.'

마음속에는 라면이 있었다.

'군만두 먹게?'

맞아 군만두가 있었지?

'프라이팬에 불 켜줘'

'이거 노예 아닙니까? 불 꺼달라, 프라이팬에 불 켜달라'

치지직 냉동만두 소리가 배고픔을 더했다.

'우리 맥주 마실까?'

'엄마, 난 캔에 마실래.'

컵에 반쯤 따른 후 아들에게 캔을 건넸다.

건배! 하며 컵을 내림과 동시에 아들은 입에 댄 캔을 얼른 탁! 하고 부딪혔다.

'아들, 주도를 모르는군.'

'죄송합니다 어머님.'

딸기맛 향 맥주가 주스 같아 벌컥 마신 모자는 12시를 못 넘기고 잠에 빠졌다.


사람들은 무력하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이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다.


'아들이 몇 학년이야?' 점심 먹으며 옆자리에 앉은 다른 부서 팀장님이 물었다.

'17살이요. 3주 전에 자퇴했어요.'

앞자리 직원도 옆자리 팀장님도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사노 요코의 말처럼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퇴근길에 만난 장미

뒤죽박죽 섞여 있는 장미에게서 꼭 한 가지 색이 아니어도 괜찮다! 는 위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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