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잇는 무력감

시대는 변했는데 삶은 왜 그대로일까?

by 솔담

10살 무렵 내가 봐온 엄마는 나약했다. 밥을 차리다 부엌에서 쓰러진 엄마의 모습을 보며 삼 남매는 엉엉 울었다. 쓰러진 엄마를 차마 두고 나가지 못하는 아빠. 아빠를 붙잡기 위한 엄마의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아침에는 당근과 오이를 강판에 갈아 꾹 짜서 아빠를 드렸고, 부뚜막에서 끓고 있는 물속에 담긴 우유를 꺼내(그때는 우유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주고 엄마는 거꾸로든 우유병에서 떨어지는 한두 방울을 마셨다. 젓가락으로 콕 찍어 구멍을 낸 계란은 아빠만의 전유물이었다.

쉰내가 나는 밥을 물로 헹궈 드시는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배탈이 난 엄마는 못 본 것 같다.


엄마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흰머리를 뽑을 때마다 10원이 올라가기에 30대 엄마의 머리에 난 흰머리가 엄마에게 고통인 줄 모른 채 흰머리 찾기에만 급급했다.

내 나이 50이 돼서 나기 시작한 흰머리를 보니 서글프다.

사람은 참 자기중심적이다.

내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것들을 현실에서 마주하니 아픔으로 다가온다.


아빠의 실직으로 형편이 어려워져 시골로 내려온 우리 집에서 유일한 반찬은 김치였다. 통통하게 살이 찐 배추가 아닌 검은 잎을 주워다 소금과 고춧가루만으로 버무린 배추김치.

‘정부미’로 한 밥과 검은 김치였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땐 그랬다. 시골에서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지만 형편은 나아지지를 않았다.

김장철이면 엄마는 큰집에 가서 김장을 해주고 대신 김치 한통을 얻어왔다. 버스 타고 전철 타고 집까지 걸어서 가져온 김치는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 무거운 걸 들고 온 엄마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엄마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고 보니 몸이 너무 아프다. 오른손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와 목에 통증이 있고 스치기만 해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을뿐더러 가서 병명을 안다고 해도 쉬거나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에 파스만 붙이고 있다.


석유를 담을 수 있는 통을 사서 주유소와 집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던 엄마. 약수를 지고 1시간을 걸어 다니며 등이 젖도록 물을 나르던 엄마.


그 엄마는 지금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또 버스를 타고 딸 집에 음식을 나른다.


토요일 저녁에 보일러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식탁 위에 있는 호박죽이 보이고 냉장고 안에 껍질 벗긴 밤이랑 엄마가 직접 말렸을 감이 보였다. 쌓여있던 설거지도 지저분했던 가스레인지 위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엄마, 할머니는 밤 껍질 벗기는거 안힘들어?"하고 묻던 아이가

"우리 먹으라고 힘들어도 참는거지?"

아이가 나보다 공감능력은 뛰어난것 같다.

애미보다 낫다.


40년 전 엄마와 내가 달라진 건 뭘까?


나도 엄마처럼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다니고 출퇴근할 때를 빼고는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올 때면 힘들어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기름값을 아꼈다는 생각에 힘을 내본다. 119에 실려간 아이를 데리고 오느라 택시를 탔을 뿐 내 돈 내고 택시를 타본 경험은 거의 없다.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내 모습이 40년 전의 엄마 모습과 왜 이리 닮았는지......


냉장고 야채실을 열어보니 몇 주 전 엄마가 버스 안에서 장바구니를 풀러 굴러다녔던 감이 시들고 상해서 먹을 수 없는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는 밥을 언제 졸업할 수 있을까?

편하게 앉아 천천히 밥을 먹고 과일도 먹는 저녁을 언제 맞이할 수 있을까?

남들도 나처럼 살고 있을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응답 하라 1998을 보니 그 시절보다 더 나아진 게 없는 듯한 우리 가족의 삶이 아프다.


부풀어 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엄마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될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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