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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덕대게 Mar 25. 2024

자해 심리

<세 가지 색: 블루> - 크쥐시토프 키예슬로프스키

한참 자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에게 자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돌아오는 질문은 한결같았다. 


아프지 않냐, 왜 하는 거냐, 괜찮냐.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이다. 생살을 칼로 도려내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그 고통보다 케케묵은 붕괴된 내면의 아픔이 더욱 컸던 것 같다. 물론 아예 고통이 안 느껴진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일종의 물리적 고통을 즐기는 이상심리가 틈입해 있었다. 칼을 손목에 대는 순간만큼은 온 정신을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 찰나의 시간은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고, 지독한 현실로부터 타나토스의 파괴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허용된 망가짐의 시간이다. 아픈 건 질색이다. 고통은 분명히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고통을 외피의 고통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그 즉시 마다하지 않고 선택할 이들이 우울증 환자들이다. 


폴란드 작가 영화계의 거장 중의 거장인 크쥐시토프 키예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삼부작 중 가장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세 가지 색: 블루>에서는 자해를 하는 이상심리에 대한 간접 체험이 가능하다. 영화는 상실의 비탄을 겪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녀가 자유에 이르기까지의 로드무비를 그린다. 지독한 우울감에 빠지면 현실과 환상 - 허구가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그 생의 감각조차 무뎌진다. 여기서 통각이란 내가 현존재로서 이 세계에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시켜 주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자해를 하는 이들 중 몇몇은, 극 중 주인공처럼 이러한 '이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해한다. 

자해가 무서운 점은 합리화에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자해에 중독된 이들은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합리화 과정을 거친다. 쉽게 설명하면 자해라는 행위를 숭배하는 것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다. 자해를 통해 내 우울감이 해소된다면, 어찌 됐든 죽지 않고 지독한 우울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도피하는 데에 성공한 것인데 이 훌륭한 도피처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자해의 고통은 일회적인 통증이 아니다. 자해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신체 훼손이라는 얄팍한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로 우울증을 가속화시키기 때문이다. 자해는 분명한 흉터가 남는다. 검붉은 색의 직선 자국. 우울증 환자들은 자해 흉터를 보며 자신들이 '비정상성'에 빠져있다는 생각의 수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일회적인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했던 행위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우울증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자해의 상흔을 마주한다. 비단 시각적인 흉터뿐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샤워를 할 때, 물이 흉터에 닿으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혹은 더운 날씨에도 반팔을 입을 수 없음을 자각했을 때. 이들은 그들이 저질렀던 불가해한 행위를  반추하며 스스로를 비정상인의 틀 안에 집어넣는다. 




자해는 스스로가 그 딜레마를 인지하기 전까지는 끊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적인 압력은 자해를 가속화시킬 뿐이다. 만약 주변에 자해를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저 기다려 주어라.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단위 시간당 실행하는 사유의 횟수가 더 활발하다. 그들은 예민한 만큼 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묵묵히 기다리며 의지할 하나의 자리가 되어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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