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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모리 Jul 21. 2021

퇴근 후에는 삽질을 합니다.

[출간 전 연재] 5평 집에서 뭐 하고 지내?


사부작사부작.


공공이가 움직인다. 찬장에서 커피포트를 꺼내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핸드드립 티백을 머그잔 위에 올려 둔다. 오늘은 원두를 드륵 갈아 필터에 소복이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내리는 일을 드립 티백이 대신한다. 커피포트에서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난다. 커피포트 전원을 끄고 뜨거운 물을 머그잔이 아닌 핸드드립 포트에 붓는다. “커피포트 물 바로 따르면 안 돼?” 모르는 소리. 핸드드립은 섬세한 물 주기가 관건. 티백이어도 게을리할 수 없단다. 스테인리스 핸드드립 포트에 얇게 난 S자 노즐에서 뜨거운 물이 조르륵 나와 티백을 섬세하게 적신다. 한 방향으로 천천히. 티백 안의 커피 가루가 부풀었다가 물방울로 맺혀 떨어진다.


“커피 한 잔 마시는데 컵을 몇 개나 쓰는 거야.”


새로 꺼낸 유리잔에 얼음을 담는 공공이에게 한 소리했다. 우리 집도 아니고 내가 대신 설거지할 것도 아닌데 저 번거로움이 참을 수 없었다. “야,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어야지. 뜨거운 머그잔에 바로 얼음 넣으면 밍밍해져.” 공공이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얼음 가득한 유리컵을 냉장고에 넣는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입 마시고, 기다렸다가 차가운 유리잔에 커피를 다시 내린다.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희생된 컵 목록을 여기에 기록한다. 머그잔, 유리잔, 핸드드립 포트, 커피포트, 실리콘 얼음 틀, 티스푼. 공공이는 시원하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설거지야 뭐, 하면 돼."


하면 된다. 이 얼마나 낡은 구시대의 개발 슬로건인가. 어쩐지 글자 사이마다 느낌표나 스타카토를 넣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궁서체로 또박또박 갈겨쓴 붓글씨가 박제된 큼지막한 액자가 떠오른다. 또 이런 것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 어쩐지 풍금이 있을 것 같은 교실에 걸려있는 급훈. 하면 된다. 싸이월드 감성(ㅎr면 된ㄷr..☆). 또는 한 손을 들고 있는 어느 독재자의 얼굴. 하면 된다. 비슷한 맥락의 슬로건인 ‘Just do it.’은 세월의 풍파에도 낡지 않고 여전히 누군가의 좌우명으로 명맥을 이어가는데, ‘하면 된다’는 어쩐지 잔뜩 들어간 힘에 비해 우습다. 단지 영어와 한글의 차이라면 사대주의를 의심해 봐야 한다.


공공이는 하면 된다고 자주 말한다. 요란한 기합이 느껴질까 봐 덧붙이자면 ‘그냥’ 하면 된다고 말을 흘린다. 거기 게으른 사람이 ‘11시 전에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고 창문 열기’가 계획이고 성취라 “이불 정리! 하면 된다!”라고 얘기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다. 이런 셈이다. 잠이 안 오는 밤 꼬박 새운 새벽 5시쯤 ‘잠이 안 오네’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출근 전 헬스장에서 자전거 타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유지어터의 숙명이라나. 


무기력하면 운동을 해.
무기력해서 운동을 못 하는 건데?
응? 그러니까 운동해야 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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