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5평 집에서 뭐 하고 지내?
남의 집에 여러 번 살고 다니며 원룸살이에는 어떤 전형성이 있단 걸 알게 됐다. 영화로 따지자면 일종의 클리셰다. 삑삑삐비빅- 고요한 적막을 깨고 들어가 불을 탁, 키고 순간적으로 밝아진 집에서 느끼는 조용한 시차. 후텁지근하고 진득한 날 사람 대신 빨래에 선풍기 바람을 양보하며 맡는 은근한 곰팡내.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바선생과의 전쟁. 다이소에서 산 냄비. 밤 10시 이후 세탁기 돌리지 말라는 아무 대미지 없는 경고와 우우웅, 벽을 타고 내려오는 세탁기 소리. 담배 냄새. 유튜브 소리. 몰상식한 분리배출과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 문 앞에 쌓아놓은 생수병.
와,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3평에서 9평 평수의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공간에 고시원, 오피스텔, 고시텔, 원룸, 원룸텔, 분리형 원룸, 1.5룸, 투룸, 반지층, 옥탑. 개인 주방이 있는지 없는지, 보증금이 있는지 없는지, 방을 쪼갰는지, 옥상에 올렸는지, 지하로 내렸는지······, 후 다양도 하다. 부르는 이름은 창의성이 차고 넘치는데 사는 건 어쩐지 전형적이라니.
다른 원룸 생활자의 집에 갈 때 훗, 하고 조용히 웃거나 으악, 하고 크게 경악하는 순간이 있다. 클리셰를 보고 그럼 그렇지 훗, 기발하게 부숴버린 클리셰에 경악. 냉장고 문 쪽 자리를 모조리 차지한 생수병에 훗, 생수병 대신 다른 것이 있을 때의 으악. 원룸 생활자는 퍽 전형적으로 살면서도 생활공간을 칭하는 이름처럼 창의적으로 클리셰를 깨부순다.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 오래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산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오층 아파트의 사층이었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계단을 따라 한 바퀴 오르면 위층이 나왔다. 엄마와 언니와 나와 기사 아저씨는 20L 생수통을 계단으로 4층까지 자주 날랐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이면서 20L짜리 생수 여러 개를 주기적으로 배달시켰다. 20L 생수통을 잡아먹는 정수기 때문이다. 옛날 사무실에서 누가 생수통을 가느냐 마느냐로 구시렁거릴법한 생수통 정수기가 집에 있었다.
생수통은 모자라지 않게 주방 한 곳에 쌓여 있었다. 빈 생수통이 점점 많아질 때쯤 기사 아저씨가 오셨다. 아마 기사님 사이에서 우리 집은 ‘기피 배송지’가 아니었을까.
정수기에서 물이 안 나오기 시작하면 까치발을 들어 파란색 빈 생수통을 바닥에 내려놨다. 엄마, 물 갈아야 해. 엄마와 생수통을 들어 올려 정수기에 끼워 넣었다. 꾸룩 꼬르르륵. 생수통 바닥이 위로 올라가면서 물거품과 함께 신기한 소리를 냈다.
생수통 하나를 겨우 혼자 들 수 있을 때쯤 정수기가 사라졌다. 보리, 돼지감자, 우엉 각종 갈색 말린 것들을 끓여낸 물을 마셨다. 냉장고 문 쪽 자리에 스테인리스 물통이 있었다. 엄마는 열심히 물을 끓였고 물은 계속 냉장고에 있었다.
독립하고 서울에서 처음 구한 3평 집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고도로 따지자면 2층인 주제에 반지하 세대 덕분에 303호로 규정된 집이었다. 집 앞에 편의점이 있었다. 이사 오자마자 편의점에서 2L 생수 6개 묶음을 사 왔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느 순간 하는 일이 있다. 물이야 뭐,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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