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5평 집에서 뭐 하고 지내?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루이스를 만났다. 루이스는 프리 하게 사진 찍는 인간인데 공교롭게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루이스는 몽골에서 찍어온 사진으로 포스터, 엽서, 핸드폰 케이스 등을 만들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품 후원자를 모집하기에 나도 후원자가 됐다. 펀딩 성공을 축하할 겸, 이웃 찬스를 활용해 배송비 2,900원을 아낄 겸 만나서 구매한 포스터를 받기로 했다.
“동네 주민센터 가는 차림으로 왔네”
스타벅스 구석 자리에서 포스터를 받아 든 내게 루이스가 말했다. 의자 밑으로 괜히 슬리퍼를 숨기며 포장지를 열자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오, 신경 좀 썼는걸. 그럼, 처음 손에 든 순간부터 기분 좋아지려면 향기 만한 게 없어. 향 잘 어울리지 않냐.
매끈하고 은은한 천에 푸른 초원이 그대로 담긴 패브릭 포스터를 펼쳤다. 찰랑찰랑. 스타벅스의 누리끼리한 조명에서도 푸른색, 초록색, 연두색, 청록색, 옥색, 파스텔 블루의 맑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랑스러운 색이다. 그런데 지는, 갑자기 괘씸한 마음이 들어 똑같이 동네 주민 차림인 루이스를 봤다. 회색, 검은색, 흰색. 그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이 단순하다.
루이스의 머리는 스킨헤드다. 본인 의지로 머리카락을 없애버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빡빡이는 비하 같고 대머리는 탈모 같고 민머리도 탈모 같고 삭발은 투쟁 같다. 일단 패션 빡빡이라고 나는 부른다.
챙 넓은 회색 벙거지를 푹 눌러쓰고 무늬와 글자가 없는 흰색 반팔티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루이스는 뭐랄까. 포스터에 모든 컬러를 뺏겼거나 채도 없는 세상에서 온 인간 같았다. 그래도 팔에 똬리를 튼 빨간 뱀 타투 덕분에 완전히 색을 잃어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이어트한다고 까맣고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루이스 앞에서 크림치즈 베이글을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루이스에겐 색이 차고 넘쳤던 거로 기억한다. 빨간 머리. 검붉거나 햇빛에 반짝일 때 나오는 은은한 빨간빛이 아닌 어두운 곳에서도 형광기 또렷한 쨍한 체리 레드 색이었다. 왜, 편의점이나 슈퍼 말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먹는 불량식품 막대사탕 색깔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 처음 본 루이스의 머리는 당장이라도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런 색이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머리카락만 계속 쳐다봤다. 사실 무례와 실례 따위의 개념이 조금 부족한 때였다. 그런 것들이 나 말고도 조금씩은 다들 궁핍하여 루이스는 여러 입에서 머리색이 양념치킨 같다는 등의 관심과 놀림의 경계에 있는 말을 많이 들었다.
루이스의 빨간 머리는 뭐랄까. 방향 없는 반항만 있는 사람 같았다. 예술가의 센티멘탈이나 섬세함과도 거리가 좀 있고, 오히려 붉은 머리의 청년. 운동권의 마스코트 같은 느낌이었다. 화려한 색과 열기를 온몸으로 발산하던 루이스는 어느 순간 카메라 안에 색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채도와 명도를 사진에 쏟아내며 루이스는 검은색, 흰색, 회색, 삭발 머리만 남은 무채색 인간이 됐다.
루이스는 사진을 제외한 것에는 대단히 단순하다. 루이스는 반지하에 살았다. 창문을 열면 소나타 차량 타이어가 보였다. 반지하답게 채광이 영 좋지 않은 집에서 꿉꿉한 2년을 살고 다시 반지하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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