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5평 집에서 뭐 하고 지내?
부모님이 사는 집인 본가엔 쌍화탕이 늘 있다. 몸이 으슬으슬 추울 때 한 병, 피곤할 때 한 병, 잔기침이 켈록켈록 나올 때 한 병. 쌍화탕은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다. 쌍화탕과 짝을 이루는 것들도 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고동색 환약과 효능을 알 수 없는 엑기스.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산삼과 무슨 뿌리 어쩌고를 술에 넣은 담금주. 생산자 얼굴이 프린팅 된 스티커가 붙은 플라스틱병에 담긴 프로폴리스 원액. 동그란 알루미늄 통에 달그락하고 스푼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용각산. 이런 것들이 늘 있다.
쌍화탕을 비롯한 건강식품은 주로 아빠의 수집품이다. 아빠는 근본적인 면역 시스템을 믿는 사람이다. 쉽고 빠르게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는 것과 더디고 느리더라도 근본부터 접근하는 선택지가 있다면 아빠는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 건강에서도 그의 철학은 한결같다. 면역력을 길러라. 약에 의존하지 말아라. 쌍화탕이니 용각산이니 엑기스니 하는 것들은 면역력에 좋은 식품일 뿐, 그의 기준으로 보면 약이 아니다. 약이란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하나씩 꺼내는 동그란 알약과 의사가 처방해준 알록달록한 알약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감기약을 먹고 자란 기억이 귀하다. 어렸을 땐 바뀌는 계절을 콧물로 알아챘는데, 뜨거운 여름이 식으면 연례행사처럼 맑은 코가 내리고 마른기침이 곧 몸살로 이어졌다. 아빠는 쉽게 감기약을 먹으면 몸이 약에 익숙해져 근본적으로 낫지 못한다며 오렌지주스를 사 왔다. 엄마가 뜨겁게 덥힌 쌍화탕에 미지근한 오렌지주스까지 마시고 한숨 푹 잤다. 지금이야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주스는 오렌지가 아주 조금 들어간 설탕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당시 오렌지주스는 비타민의 결정체였다. 비타민을 먹고 이겨내라. 이겨내라 작은 아이야.
아빠의 철학이 내 면역력을 ‘근본적으로’ 개선했는지는 영 요원하다. 그런데도 분명하게 좋은 점이 있는데, ‘약발’이 잘 받는다는 것이다. 약을 먹은 순간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고 느낀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은, 뇌를 꺼내 씻어내고 싶은 두통을 참고 참다가 타이레놀 한 알을 먹는다. 30분 뒤 통증이 없다고 느낀다.
어떤 친구는 나를 보고 어떻게 약만 먹으면 멀쩡하냐고 놀라워하는데, 나는 마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약을 먹었다. 스스로 이겨내는 면역 시스템을 거스르고 약의 도움을 받았다. 그만큼 아픈 것이었다’ 여기에 더한다. ‘약을 먹었으니 이제 괜찮다.’ 어떤 보상심리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내성이 생길 만큼 약을 자주 먹지 않았으니 약발이 잘 받아야 한다.’ 같은.
이런 마음이 플라시보 효과를 만든다. 플라시보 효과란 의사가 약효 없는 약을 효과 있는 약이라고 속여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긍정적인 약효가 난다는 심리 현상이다. 나는 플라시보 효과에 아주 정확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약을 먹으면 약효가 난다. 아파서 반차를 썼는데 회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쌍화탕과 오렌지주스를 먹고 자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5평 집에 산다. 플라시보 효과 덕분인지 아빠의 철학 덕분인지 독립 후에는 크게 아파본 기억이 없다. 이제 계절의 변화에도 콧물 하나 꿈쩍하지 않는 정도가 됐다. 방심했다. 크게 아파본 기억은 없는데 크게 서러운 기억을 그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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