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인간이라는 영장류는 유일무이하게 눈을 감고 상상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피사체를 보고 나서 눈을 감는다면 그 너머는 우주가 될 수도 있고, 작은 모래알 틈이 될 수도 있으며, 겨울날의 씨오라기 속일 수도 있고 초여름의 장마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가진 ‘상상력’이라는 것의 힘이다. 불이 켜졌을 때 야광 스티커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일. 초승달 모양의 구멍 너머의 모습에 대해 떠올려 보는 일. 보이는 스크린을 거부하고 눈을 감은 채 그 이상에 대해 꿈꿔보는 일. 그것은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적이고, 영화 역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렇기에 이 감독이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본다면, 그 이유는 아직까지 건재한 영화의 기적에 대한 가능성을 설파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마리오는 과거에 영화 일을 했었지만, 지금은 철이 지나버린 필름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으면서도 영화의 기적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지금 다수의 관객들이 영화를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 영화는 그저 보고 즐기는 거야. “ , “ 영화는 그냥 영화지 뭐. “ , “ 영화가 어떻게 인생을 바꿔? “ 심지어 영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제는 영화의 기적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영화는 그저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이전에 꽤 인기 있었던 < 흑백 요리사 >라는 프로그램에는 이런 말이 나왔었다. 한 참가자가 채소를 가지고 배티테리언 사시미를 만들었는데, 그 음식을 시식할 때 눈을 감고 먹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눈을 감고 음식을 먹게 된 심사위원은 이야기했다. “ 당신은 저에게 자유를 줬어요. 본인이 ‘ 이건 이거예요 ‘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눈감고 드세요. 근데 그게 자유로우니깐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게 다 본인이 의도한 거가 되는 거예요. “ 이 말의 저의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결국 음식도 1차적으로 시각적인 정보를 인식하고 나서 그것이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시각적 정보가 차단된 채 그저 우리의 미각에 의존하여 그것을 맛본다면 그 눈을 감은 감각 속 세상은, 그 어떠한 음식도 될 수 있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 영화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혹은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영화의 기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눈을 감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모호한 연출은 그것에 대한 증거이다. 그렇게 2시간 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하나의 긴 메시지를 꿰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는 우리에게 배지테리언 사시미를 만들어줬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먹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먹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영화라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만 제시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니라, 볼 수 없는 것들도 선보일 수 있는 예술이라고. 시선의 예술이지만, 그렇기에 시선을 차단했을 때 오히려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9월 16일> 그림 속 초승달 뒤의 모양을 상상하는 것은, 사뭇 예술가들의 역할이었다. 나는 그것이 예술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이 순간만큼은 예술가가 되어주길 간청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점점 침체돼가고 있는 영화의 산업을 살리고, 우리 관객들이 다시금 영화의 기적을 믿고 그로 인해 “ 영화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 “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 영화 ‘ 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보자. 나는 이영화에서 나오는 단어인 ‘ 슬픈 킹’으로 언급되는 체스판 속의 ‘킹’ 이 현시대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킹은 모든 것의 방해를 받는다. 킹은 체스의 시작부터 모두에게 둘러싸여 있고, 그 주위의 모두가 움직여야 그제야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지만 쉽사리 움직이긴 쉽지 않다. 그래서 이 킹이라는 녀석은, 제일 중요해 보이지만 사실 제일 불쌍해 보인다. 킹이 죽으면 게임은 끝이 난다. 그렇게 킹은 살기 위해 모두의 영향을 받으며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제 영화 산업은 어떠한가?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배급, 심사, 투자 등 다양한 조건들 속에 둘러싸여 그것들을 하나씩 해결해야 영화는 비로소 한 발짝 씩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은 재미가 없으면 보지 않고, 너무 의미심장하고 무거운 이야기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곧 영화의 죽음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영화(킹)는 살기 위해 다른 모든 기물들에 둘러 쌓여 수비적으로 차츰차츰 살아남는 움직임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 영화 산업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눈을 감고 그 기물을 잡는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그 슬픈 킹이 자유로운 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비좁은 체스판이 우주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영화라는 것도, 우리 관객들도 눈을 감고 우리가 가진 무한한 상상력을 믿으면,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그것이 영화가 가진 숭고한 가치이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인간들이 가진 능력이기에 다시 영화를 바라봐 봐 달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영화를 구원하는 길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듯한 우리들의 뒷모습과, 스크린 (영화), 그리고 그 등장인물들과 눈을 마주치는 우리 (관객), 눈을 감는 훌리오 (예술)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사기가 멈추는 소리(현실)를 통해 이 모든 시퀀스들을 서로 엮어서 영화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낸다.
비록 당신이 지금 보는 스크린 속 화면은 이런 모습이지만, 그것의 불이 켜지고 당신의 현실을 마주했을 때, 천천히 눈을 감고 영화 속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다시 눈을 떠 본다면 그것은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것이 영화의 기적이고 인간의 숭고함이야. 그러니깐, 우리 다시 한번 이 기적을 믿어보자.
그렇게 나는 이 감독의 뜻대로, 영화가 끝난 후 한참을 눈을 감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성큼 움직였다. 눈을 감은 나는 그제야 그곳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영화라는 매체가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구원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가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영화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 끝에 두 눈 감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