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살아라. 우린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 그렇게, 우물 안에 갇혀버린 개구리라도, 고개를 들어 비치는 햇살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그곳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바라보는 넓은 세상보다 아름답다.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 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 밝은 밤 中 -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 '우물'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을 따라간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다. 그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같은 구간을 지나, 같은 공간을 청소하고, 같은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그의 일상은 매일매일, 반복된다. 어쩌면 매우 단조롭고 지루해 보인다. 누군가는 그런 그의 삶을 보며 “ 희망이 없는 삶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단조로운 반복을 기어코 미학으로 바꿔낸다. 야쿠쇼 코지의 얼굴이, 표정이, 자세가, 삶이, 그 모두가 말하고 있었다. 반복의 미학은 곧 인내의 윤리이고, 인내는 우리의 존재를 존엄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아름답지만 어딘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아날로그식의 4:3으로 설정된 비율,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는 듯한 화면의 색깔은 그 자체로 늙어버린 야쿠쇼 코지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를 상징하는 듯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들은, 지금 이 세상에선 오히려 그 값이 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찾아 나서는 그의 삶이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지점들에 누군가는 “아, 뻔한 영화구나”라고 여길 수 있지만, 마지막 야쿠쇼 코지의 표정 연기를 보면 감독이 이렇게 설계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맨날 다른 노래들을 틀며 삶에 변주를 주고, 사소한 지점들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듯한 그의 삶은 반짝여 보이지만,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인간은 연약하고, 전지전능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행복은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히라야마는 말이 없다.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하루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그는 매일 다른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자그마한 식물의 성장을 기록하고, 하늘을 찍어내며 그림자를 쫓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삶이라는 것이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삶에 무언가 대단한 걸 이뤄야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게 배우지 않았던가. 존재 그 자체로 빛나는 삶은 '성공'이나 '완성'이 아니라, '지속'이라는 숨결로 이루어진다. 그 숨결을 따라가며 우리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야쿠쇼 코지는, 그림자 둘이 겹치면 더 어두워진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그의 삶에선 단 하나의 빛이라도 겹쳐질 때, 그 빛은 더욱 밝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단순히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것이, 가끔은 지나치게 깜깜해, 아주 희미하게 들어온 빛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의 존재의 위대함에 대한 영화이다. 그에겐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주워진 것이 이 무수히 반복되는 굴레 속 사소한 것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정하다. 묵묵히 화장실을 닦고,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햇살을 바라본다. 그것은 체념이 아닌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요한 자기 구원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구원의 영화다. 누군가에 의해 건져지는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일상에서 길어 올린 구원이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너졌던 기억을 천천히 봉합하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햇살을 보고, 하늘을 찍고, 변기를 닦는 그 하루하루가 곧 그의 기도이자 구원이 된다. 반복의 하루 속에서, 작은 기쁨을 포착하고, 그것에 반응하고, 다시 내일을 맞는다는 것. 그것이 히라야마가 살아내는 방식이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의 방식이다.
마지막 장면, 히라야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지만, 그 얼굴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고통, 기쁨, 허무, 충만. 그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낸 그의 표정은 단지 배우의 연기 이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다. 상처받았지만 여전히 살아 있으려는, 그래서 오늘도 웃으려는 한 인간의 살아 있는 얼굴. 하지만 가끔 그것이 잘 안 될 때도 있어 구겨지는 얼굴. 아마 그것은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의 하루를 생각했다. 나도 나만의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나만의 나무 그늘을 찾아가고, 나만의 기억을 작게 기록해두고 싶다고. 그렇게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라는 것을, 그 작은 삶의 반짝임이, 나의 하루에도 스며든다. 그 작디작은 기적이, 우리를 구원한다. 나뭇잎이 태양빛을 모두 가려도, 그 틈새로 한 줄기 빛은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우린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