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하다는 건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슬픈 킹이 아니라 자유로운 퀸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우리에게 무한 기적을 안겨주는 영화. 그곳이 어디든 영화의 힘을 빌려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영화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는 보는 이에 따라, 삶에 관한 영화 혹은 영화에 관한 영화, 그것도 아니면 ‘ 예술이란 무엇인가? ‘ 에 관한 영화로 느껴질 수 있다. 혹은 이러한 관점들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더라도 그것은 정답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 영화 ‘라는 한 무궁무진한 매체의 힘을 빌려, 그것을 우리가 시각의 예술로써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통해 무한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우리에게 그 자유로운 미지성의 존재에 대해 알려준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채 영화를 살펴보겠다. 우선 전체적인 구조로 이 영화를 바라보았을 때는, 어떻게 보면 액자식 구조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첫 시퀀스 이후에 지금까지 나왔던 장면이 사실 영화의 장면임을 알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이 이 영화를 덮고 있는 첫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인 ‘ 훌리오 ‘ 가 그 촬영 이후에 실종됐었고, 현재 시점에서 그 배우를 쫓는 스토리가 매인으로 이 사이에 끼워져 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금 훌리오와 다른 일행들에게 첫 시퀀스 이후의 영화 장면을 보여주면서, 결국 이 영화는 두 개의 영화 장면 속 어떤 이야기가 들어간 형태의 구성이 된다. 하지만 그 액자 속의 이야기들은 중요한 줄거리라기 보단 감독이 하고 싶은 메시지들을 전달하기 위해 골라낸 어떤 이야기보따리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무척 신기한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요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혹은 중요한 사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예를 들어보자면, 실종된 훌리오를 찾아간 딸이 그와 처음 마주했을 때, 훌리오가 ‘ 그것을 알아보느냐, 혹은 알아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 과정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사건의 핵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제시 없이, 딸이 그저 눈을 감으면서 그다음 시퀀스로 넘어가게 된다.
혹은 중요한 사건에 대한 해답만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퀀스와 그 이후의 시퀀스로 넘어가는 지점에 있어서 눈을 감는 듯한 페이드 아웃 형식으로 연출이 되는데, 마치 그것이 실제로 우리가 눈을 떴다가 감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하나의 큰 흐름은 유지가 되지만 사실 이야기의 맥락이 툭툭 끊긴 채 장면 간의 개연성이 조금은 모호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감싸는 첫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 역시, 영화의 흐름을 놓고 보았을 때, 그 영화 속 연기를 하는 훌리오가 사라진 딸을 찾으러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그 딸을 찾는 어떠한 풀이, 혹은 이야기 없이 그저 딸을 찾아오는 것만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이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구나.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고 이 의심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은, 기억을 잃은 훌리오에게 그의 친구인 미겔이 훌리오가 배우 시절에 찍었던 필름, 즉 이 영화를 덮고 있는 그 시퀀스를 상영해 주는 장면이다. 이는 기억상실에 걸린 훌리오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고 다시 기억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형태로 영화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을 보면, 영화를 올려다보는 관객들, 그리고 멀찍이에서 그들의 뒷모습과 스크린을 함께 담는 숏들, 또한 “스크린”이라는 제3의 담벼락을 넘어 기어코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그 안의 등장인물들의 정면 모습만 보여준 채, 훌리오가 눈을 감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봤을 때, 과연 훌리오가 영화를 시청하고 나서 기억을 찾았을까? 하는 질문은 이 영화의 핵심을 꿰는 의제이기도 하지만, 이것에 대한 해답은 끝까지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눈을 감으며, 영화의 결말 부분 역시 모호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독이 이 모든 영화의 연출과 구성들을 의도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왜?라는 물음이 이것에 잇따라 오는데, 나는 그것이 앞서 이야기했던 감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캄캄한 방 속 야광 스티커가 붙어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야광 스티커는 상징적으로 스크린이다. 영화 속 영사기는 어두운 배경 속 스크린에 다양한 상(Image)의 형태로 우리들의 시각에 어떤 명확한 형체로써 전달되며,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판단하게 된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는 시선의 예술이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 별 모양의 야광 스티커가, 불이 켜져도 그 모습이 여전히 별 모양일까? 예시를 한 가지 더 들어보자. 르네 마그리트의 < 9월 16일 > 그림을 보면 나무의 한가운데에 초승달이 보인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그저 나무 사이에 초승달이 있다는 걸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저 달은 정말 초승달 모양인 걸까? 만약 나무에 초승달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라면?
이 두 가지 예시가 의미하는 메시지를 알겠는가. 우리는 가끔 우리의 눈을 너무 믿어서 역설적이게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결국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 초승달 모양의 구멍 뒤에는 보름달이 있을 수도 있고, 그믐달이 있을 수도 있으며, 혹은 달이 아닌 노란색의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 불이 꺼진 방에서 보이는 그 별 모양의 야광 스티커는 불이 꺼지면 별 모양이지만, 불이 커졌을 때 그 모양을 본다면 별 모양의 야광물질만 묻어있는 그 어떤 모양일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우리에게 약 3시간 동안 보여준 그 스크린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니깐 이 감독이, 이 영화 내내, 중간이 빠진 액자식 구성 속에 개연성이 부족한 스토리들을 줄줄이 꿰어 불확실한 스토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보는 이 시선으로서의 영화가, 시각 매체로서의 영화라는 산물이 단순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어코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며, 그 모든 불확실함 것들을 엮어서 무엇이든 창조해 낼 수 있는 영화의 가치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2부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