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서편식
최근 흥미로운 단어 한 가지를 새로 접하게 됐다. “뷔페식 독서”. 듣는 순간 그 짧은 단어에서 나오는 유쾌함과 직관성에 박수가 절로 쳐졌다. 동시에 독서 편식을 많이 하는 나로서는 스스로 저 단어에 패배 의식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버렸다. 아무래도 추리소설류만 읽는 것에 약한 자격지심을 은은하게 느끼고 있었던 듯. 그런데, 편향적인 독서가 과연 나쁜 것일까?
독서 DNA는 대대로 세대를 계승하며 내려온다. 우리 엄마 책장에 꽂혀있었던 수많은 추리소설들. 물론 그 많은 책을 읽어보진 않았으니 전부 다 추리소설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제목만 봐도 느껴지는 느낌이 있으니까. 스마트폰이 없었던 세대라서 가능했던, 어떻게 보면 감사해야 할 활자 읽기 중독에서 비롯된 강박적인 제목 읽기. 아직도 기억에 남는 앵무새 죽이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시드니 셀던, 애거서 크리스티. 엄마의 뚜렷한 취향이 풍기는 서재에서 내가 과연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엄마의 독서 편향 유전자는 오롯이 나에게서 발현되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혈통”이지 않은가.
고등학생 때, 지금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우리 때는 “야자”라는 것도 있었고(palm tree말하는 거 아님), 스마트폰은 없었다. 졸업할 즈음 아이폰이 첫 출시 및 상용화되었다. 게다가 슬프게도 핸드폰 사용도 불가능한 기숙사 학교였다. 중학생 때는 마비노기니 바람의 나라니 하는 게임들 덕분에 책은 거의 안 읽다시피 했었는데 기숙사 학교는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유희거리는 책 읽기 뿐이었다.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는 무리에 끼는 것도 아니어서 거의 독서실 VIP가 되었다.
처음엔 그냥 서점에서 많이 보던 베스트셀러가 보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읽었다. 그러다 발견한 요시모토 바나나. 일단 심플하게 이름이 바나나라서 궁금했다. 예명의 중요성을 여기서 또 느꼈다. 어쨌든 어그로를 끌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엔 아직 역사관이 정립되어있지 않아서인지 일본작가의 책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고, 읽다 보니 너무 어둡고 재밌던 것!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흑염룡 한 마리씩은 키우고 있다고 느끼는 계기가 됐다. 중2병을 겪지 않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나였지만,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친구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전혀 그렇다고 느끼지 못했던, 오히려 그 친구들이 철없다고 느꼈던 나였지만, 사람을 죽이고 죽인 사람 추리하는 소설은 너무나도 재밌었던 모양.
그렇게 시작된 多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관심 도서를 신청을 해봤다. 독서에 취향이란 것이 없었던 나였는데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선호하는 작가가 생기고 그 작가의 책을 다 탐독해 갔다. 베스트셀러인지 구분 없이 제목이 눈에 띄면 가리지 않고 읽어나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껏 고등학교 도서관인데 장서의 다양성도 부족하고 당연히 거의 대부분의 책이 유명 베스트셀러였을 것. 전부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살인만이 켜켜이 쌓인 高도파민에 중독되어 이제 일반적인 책은 읽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에 있었다.
그 취향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최근 들어서는 알라딘 매장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1권씩 구매하는 것이 데이트 코스가 돼버렸다. 물론 남자친구는 책이 아닌 나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책을 고르고 집에 장서로 모셔뒀다. 여 타 소장학파와는 다르게 나는 다 읽었다. 돈을 소비했으면 최대한 효용성을 끌어올려야 하기에. 물론 재밌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이제 집에 가면 온갖 자극적이고 무서운 제목의 어두운 색의 북커버를 가진 책들이 내 키만큼 쌓여있다. 효율성을 위한 E북은 생각만 하고 구매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빳빳한 종이를 넘겨가며 얼마만큼 읽었는지, 결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며 읽는 방식을 사랑하기에.
방 한구석에 조금 노랗게 빛바래버린 종이에 은은한 곰팡내가 나는 어린아이에게는 다소 무시무시한 내용의 책들이 몇 겹으로 쌓여 간다. 할머니에게서 시작된 그 독서 DNA는 손녀가 될지 손자가 될지는 모를 그 아이에게까지 분명히 계승될 것이다. 분명히.
그런 취향이 부정적인 영향은 없을것임을 스스로가 방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은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