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돈모으기
드디어 나왔다 돈모으기.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내가 할 말이 제주도에 있는 말의 전체 숫자보다도 더 많을거라 자부한다. 내가 썼지만 다소 재미없는 수식어구였다고 생각이 든다.
어쨌든,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은 그래도 나름 자주 했지만 어쨌든 갖고싶은 것(예를 들어 천사소녀네티 요술봉이라든지... 웨딩피치의 천사의 거울이라든지.. 유년시절의 결핍은 이렇게도 오래도록 사무치게 된다)을 사달라 말 못하고 친구들 간식 사먹을 때 같이 사 먹지 못한 시절이 꽤 오랜기간 있었다.
물론 학원비에는 아낌없이 투자해 주신 엄마라 용돈을 더 달라고 하면 주셨을지도(용돈 제도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되었다. 영업일 기준 하루 100원. 주말, 공휴일 무급. 다음 해 협상 시 연 100% 상승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성공신화도 있었다.), 사달라고 마트에서 드러누워서 체통도 지키지 못한 채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면 그 불굴의 정신에 감탄하여(나는 유난히 내성적인 아기였다)
사주셨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행동을 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와는 정서적으로 라포가 형성되지 못했었다. 만약에 드러눕는다? 바로 고아원 원장님 면담 프리패스에 들어간다 이 말이다.
뭐 농담이고 A.K.A. 철이 빠르게 들었다. 욕구가 없는 아이가 아니라 표현을 못하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여기에 다 쓸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나는 死語인 “자린고비”에 가까운 상태로 평생을 살아왔다. 완곡하게 알뜰하고 유달리 합리적인 소비를 해왔다고 표현해면 더 기분이 좋을 거 같긴 하다.
사실 친구들 사먹을 때 같이 사먹었으면 됐지만 한푼한푼 돈 모으는 재미가 나에겐 더 컸었다. 땅 파봐라 100원이 나오나. 나온다. 몇 번 파봤다. 자판기 밑에서도 많이 주웠었다. 여기에선 주로 500원을 주웠다. 나는용돈 100원도 아꼈고 땅 파서 나온 500원도 안 썼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빠의 흰머리 1개는 10원으로 쳤었다. 상당히 최저시급과는 무관한 금액을 받아왔음에도 노동부에 신고나 민원을 넣을 생각은 추호도 못했는데 이제와서 민원받는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인간은 절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더라. 나 빼고. 차라리 암막 커튼을 사서 칠지언정 참고 살았던 창문밖으로 들어오던 빛공해의 날카로운 기억에 눈이 아직도 시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흰“머리”를 뽑은 것이 과연 아빠에게 도움이 됐을까하고 묻는다면 아니였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 노동의 가치는 무엇이었을지. 어쨌든 간식은 많이 안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도 같이 커져버린건 어째서일까. 할머니의 사랑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을까. 매주 토요일 점심을 떡볶이 데이로 만들어준 우리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다.
그렇게 돈을 잘 아끼고 잘 모으던 나였기에 명절에 받은 용돈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엄마가 반 강제로 ‘모아주겠다. 주지 않으면 나중에 국물도 없다(아직 상속받을 때가 아니라 알 수 없지만 어떤 국물일지 궁금하긴 하다)’ 식의 협박을 해왔지만 독립투사마냥 항쟁하여 내 돈에 대한 주권을 지켜냈다. 그 때 그에 굴하였다면 돈을 잘 모으는 습관은 만들지 못하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아이를 키우는 분이 이 글을 우연히라도 읽게 된다면 명심해두시길!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모은 세뱃돈을 한푼 정도 쓰고 나머지 100푼 정도는 모았었고, 취업하기 전까지 알바 한 번 정도 해서 그돈은 어학연수에 때려박은 뒤 다시 제로부터 시작하여 그 흔한 유럽여행 한 번 못 가보고 800만원 정도를 모은 채로 직장인이 되었다.
혹시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이후로는 세뱃돈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 전에도 고3이라는 리즈시절에 잠시 50,000원이라는 거금을 주는 어른도 계셨지만 대부분 만원 정도의 세뱃돈을 주심에 그쳤다. 그 적은 돈마저도 쓰지 않고, 아이폰 한 번 언감생심 살 생각도 못한 채 알뜰살뜰한 삶을 이어왔기 때문에 이룩할 수 있었던 쾌거라 생각한다. 사실 돈을 모으고 싶으면 알바라도 좀 더 했으면 좋았을 텐데 노는 게 제일 좋았던 뽀로로 같은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내 가장 큰 패착은 돈은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박봉으로 유명한 직업 중 하나를 갖게 된 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강남에 집 2채에 타워팰리스에서 야경을 보면서 와인셀러에 늘 상비한 제일 좋아하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마시면서 아련한 과거 향수에 지나간 추억을 곱씹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돈을 많이 모았겠지. 나는 부자를 집착광공과 일치하여 생각하나보다. 하긴 광공 중에 거지는 없을테니까. 있나? 있으면 나중에 알려주세용~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지만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멘트는 거의 없었는데, 경종을 울린 것 중 하나가 “모은 돈 밝히지 마라”였다. 그것만큼은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 개뿔도 못 모으긴 했지만 그 개뿔마저도 누군가에게는 큰 돈일 수 있으므로 나름의 신조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몇 번 모은 돈을 말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 사람과의 결과가 좋지 못했다.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정도 밖에 없나보다. 대부분 다 맞다.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하는 만큼 그 사람이 나에게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 가능성 또한 비례한다는 보증은 없다. 그게 아니라 그냥 시절인연이었던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며칠 전 발표된 청약에 낙첨되었다. 대출금 받을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하다. 과연 그 동네에 내가 살고 싶은 건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기도 했으니.
내 돈모으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 집 마련이다. 서울까진 아니어도 경기도 인근이라도. 사주를 믿진 않지만 역마살이 끼었나 싶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여러 지역에서 살았는데 앞으로 나는 어느 곳에 살게 될까. 정착할 수 있을까? 내집 마련을 하면 정착할 수밖에 없겠지 최소 5년정도는.
미래는 무궁무진하고 한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다른 평행우주의 나는 싱글몰트 온더락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겠지. 지금 내 타임라인의 우주에서의 내가 앞으로도 현재 직장에서 계속 있을지 아니면 별풍선을 받는 삶을 살게 될지 아니면 곰인형 눈알을 붙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나는 나대로 모으며 살아가겠다. 아자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