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의 잠자리가 안녕하기를…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그 모든 눈을 감는다는 것에는,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남게 된다.
부정은 언제나 불편하다. 책임은 회피하고 싶다. 사회적 무감각이 가끔은 약이 된다. 개인의 문제로 눈을 감는 것은 방관적 차원에서 그칠 수 있지만, 공동체를 위협하는 문제에 눈을 감는 것은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그 문제의 공범이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독재와 폭력, 부정이 가능했던 순간에는 늘 그 과정에서 눈을 감아준 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한다.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바깥이 아닌 안쪽을 향하는 시선을 두고, 눈을 감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의식 즉, 양심과 대면해야 한다.
양심을 품고 한 시대를 지켜내야 하는 어른, 나이 마흔은 그런 나이다. 중년의 무게를 짊어지고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부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휴식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눈을 감는다. 삶의 피로를 씻어내기 위해, 잠을 통해 살아갈 힘을 충전하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눈을 감는다.
절대 변하지 않는 세상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살아간다. 눈을 감을 때마다, 영원히 눈을 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하루를 더 소중하게, 조금 더 충만하게 살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밤마다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시간을 산다. 그 사실만 잊지 않아도 ‘문제를 외면할 것인지, 스스로 내면과 마주할 것인지, 회복을 통해 다시 일어설 힘을 내 볼 것인지’에 대한 모든 망설임 앞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사업과 육아를 병행하며 내일이 두려울 정도로 시간에 쫓기던 때가 있었다. 빡빡한 일정,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업무, 풀리지 않는 대인관계가 주는 압박감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를 괴롭힌다. 그 속에서도 일말의 기대를 찾아야 한다. 두려움만 안고 잠에 들면 안 된다.
그래도 내일이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
오늘 넘기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내일은 찾을지도 모른다,
내일 일정만 버티면 아주 잠깐, 내 시간도 가질 수 있다.
두려움은 나를 소진시키지만, 기대는 내일의 문을 열게 한다.
하루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작은 확신으로 다시 눈을 떠야 한다.
내일의 나라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으로 다시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를 품고 잠에 들어야 한다.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한다면, 나는 여전히 나의 삶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건 몸과 정신이 깨어있다는 뜻이고, 내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내 손으로 조타를 잡는다는 의미다. 주어진 항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나의 속도와 나의 선택으로 나만의 길을 그어야 한다. 그 작은 움직임이 쌓여 내 삶의 전체적인 방향을 바꾼다. 가끔은 거대한 파도에 밀려 원치 않는 곳으로 떠밀려가도, 한 번 더 방향타를 잡아야 한다.
삶이 나를 쓰게 두지 마라. 내 삶은 내가 쓴다.
오늘도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써 나아가는 중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돈이 갖는 의미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문제는, 돈의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돈은 우리에게 집을 주고, 밥을 주고, 사랑과 행복도 준다. 하지만 동시에 모멸감, 열등감,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끝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소진하게 만드는 부담도 준다.
누군가 돈이라는 공을 던진다고 해서 모두 받아낼 필요는 없다. 받을지 말지, 선택은 나의 몫이다.
돈은 상대적 의미가 크다. 그러니 남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삶을 선택한다면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저당 잡혀야 한다. 대부분 회사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시간과 삶이 저당 잡혀 있다. 말이 좋아 ‘근로’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며 정해진 임금을 받는 것, 어쩌면 그것은 현대판 노예제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것들만 내려놓아도 돈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돈이 조금 필요한 삶을 산다면 조금만 벌어도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노예의 삶이 아닌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돈이 없어서 쪽잠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돈이 너무 많아서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돈이 적어도, 많아도 결국 돈의 노예가 될 수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돈 때문에 눈도 편히 못 감는다.
우리는 사랑을 속삭일 때도 눈을 감는다. 잠을 자는 아이 곁에서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사랑을 말한다.
임종에 계시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 고백이 그런 것이다.
“어머니가 내 어머니라서 고마웠어요.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했어요.
저도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어요.
정말, 사랑해요 어머니…”
눈을 감는다는 것은 사랑을 멈추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늦은 저녁, 잠 대신 글을 택하는 지금이 그렇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한다면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말은 잊히고 기억은 흐려지지만, 글은 누군가의 삶 속에 남는다. 글은 사랑을 영원히 살아있게 한다. 그것이 글의 힘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내 사랑을 남길 수 있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하며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살아 있고 싶다.
사랑이 글로 남는 삶,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일까?
나는 그저, 최대한 나답게 살다가 나답게 눈을 감고 싶다. 예기치 못한 사고라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결국, 만약을 위해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늙음과 병은 사람에게서 존엄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사회는 늙고 병든 사람을 손실과 부담으로 취급하곤 한다. 그래서 늙고 병든 부모님을 요양기관에 모시고 우리는 ‘어쩔 수 없었다’며 사회를 탓하고, 형제자매를 탓하고, 자신을 탓하며 내내 죄책감과 상처를 안고 산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모시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마음을 지켜드리느냐다.
존엄한 죽음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겨진 가족에게 지켜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낼 때, 그들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두렵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그렇게 사랑을 건네는 사람만이 자신의 마지막 또한 존엄하게 지켜질 것을 믿을 수 있다.
처음 눈을 뜨고 세상에 왔을 때 우리는 많은 축복 속에 태어났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에도 그때처럼 사랑받으며 떠나고 싶다. 누구나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사랑을 남기고, 사랑을 받고 떠나는 것.
그것만큼 존엄한 마침표는 없을 것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단순히 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내려놓는 일이자, 내일을 살아내기 위한 준비이며,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잠을 미리 연습하는 일이다.
우리는 눈을 감을 때마다 선택한다.
문제를 외면할 것인지, 스스로와 마주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일어설 힘을 다질 것인지.
눈을 감는다는 것은 삶을 멈추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일을 향해 가장 조용히 움직여가는 순간이다.
오늘, 당신의 잠자리가 안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