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도둑질

by 감자부침


새 바람을 불어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 건 스무 살 때였다. 만족스러움과 설렘으로 시작했던 대학생활도 얼마 안 가 익숙해졌고, 지하철 콩나무시루에 실려 다니는 기분에 눈물이 나오던 그 어느 날. 다시 펜을 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게 흐려지고 사라지고 다 지나가는 듯 느껴졌기 때문에 종이 위, 흰 바탕화면 위 검은 글씨가 필요했다. 그렇게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기 쓰기가 시작되었다.

때늦은 자아의 확립인지, 제때 찾아온 방황일지. 지금도 과거도 닮아있다.


또 하나는 스스로 전시와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아지트 같은 곳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새로 생긴 인연들로 가득한 가면뒤의 내가 사는 sns계정 말고, 나의 사색과 오롯한 시간을 기록할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전시 아카이빙을 할 비밀계정을 만든 지 벌써 3년이 지나갔다. 3년간 총 17곳을 다녔다. 골목골목을 걷고, 새로운 장소를 찾고, 작품을 살 돈은 없지만 언젠가는 사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공간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 너무도 좋았다. 대부분은 홀로, 몇 곳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모든 게시물에 녹아든 나의 애정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게 보인다.


어떤 선택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된다. 올 겨울은 내 인생에서 쉼표가 될 것이라고 결정을 한지 한 달이 넘었다. 어느 정도 학교 생활이 마무리가 된 이번 주 금요일에 새로운 전시를 찾았다. 엄마와 함께 갔는데,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좋아서 찾아간 첫 전시였다. 주제는 ‘빈틈 사이의 흔적’, 작가는 삶에 찾아오는 중요한 타이밍(시기)들 사이를 메꾸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 어쩌면 나를 대책 있는 백수로 만든 올해의 실패는, 나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인생을 흔히들 긴 마라톤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목을 축이고 내가 달리는 이 코스가 맞는 길인지 생각해 보기 위한 빈틈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틈을 어떤 흔적으로 채워야 할지 생각하고 실행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구나. 나는 왜 이렇게 단순하지 못하고 끝없이 고뇌하는지 스스로에게 답답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고 나를 그냥 마음껏 연민하고 사랑해 버렸다.


다른 이의 창작을 보는 시간은 즐겁다. 누적된 시간과 투철했던 고민의 고통을 달콤한 한 입으로 즐기니까. 얄밉게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위치성을 가진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보기 쉽다. 편협한 사람이 되기는 너무도 순식간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읽어내는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 나는 어쩌다 그 방법을 전시관람으로 찾았던 것이다. 운이 좋았지.

대책 있는 백수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전시를 보러 다니는 나의 달콤한 도둑질은 계속될 것이다. 대책 있는 사회인으로 넘어가도, 때로는 대책이 없어지더라도 끝없이 훔쳐먹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살기로 다짐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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