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goes on

by 감자부침


2026년 붉은말의 해가 떠올랐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매년 붕 떠있는 기분으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연말의 끝자락을 아쉽게 놓치고서 새 해의 안부들을 전하고는 한다. 올해도 다르지 않게 시작했다. 25년의 마지막 날, 올해의 드라마, 올해의 문장, 올해의 음식, 올해의 장소 등등을 적으며 혼자서 소소하게 하는 연말결산을 하고, 애증의 2025년을 지나왔던 스스로에게 편지를 한 장 썼다. 그러고 나서 새해 목표들을 리스트업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매년 반복되는 규칙적인 수면패턴이다. 그동안은 민망할 정도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물론 여러 일들에 바빠서 수면시간을 지키지 못했지만, 사실 전부다 핑계라는 건 모든 사람이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6년도 역시 저녁 11시 취침, 아침 8시 기상을 꿈꾼다. 단, 1월 1일은 제외다. 그건 어렸을 적부터 포기할 수 없었던 연기대상 시청 때문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드덕(드라마 덕후)이다. 내 인생의 첫 작품은 '선덕여왕(mbc)'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나온 드라마라서 부모님은 내가 못 보게 막으셨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들 중에 부모님이 계시다면 한 말씀드리겠다. 애들은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는다. 나 역시 방문을 열고 그 틈새로 1시간 동안 다리 저린지 모르게 다 봤다. 눈치채고도 모른 채 해준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묘한 해방감에 취해서 신났었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 보면, 사극이었기 때문에 유치원생인 내가 서사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봤던 건, 아마도 배경음악(OST)과 화려한 색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방사수를 하거나 N차 복습을 하는 작품들은 역사드라마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인물들 간의 관계망이 촘촘해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거나, 주인공들 간의 얼굴합이 완벽한 작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역사드라마 중에는 '미스터선샤인(tvn)', '고려거란전쟁(kbs)', '연인(sbs)'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드라마 '연인'은 삼전도의 굴욕, 인조의 도망, 외교관계, 소현세자의 비극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피난을 떠나는 일반의 백성들이 얼마나 처절한 생존을 해야만 했는지, 납치당해 끌려갔던 조선의 여인들이 목숨을 부지해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당했던 수모와 죽음보다 못한 처지에서 꽃 피운 생존력을 생생히 그려낸 작품이라 너무도 사랑했다. 멜로는 그 서사를 보다 절절하게 그려내기 위한 장치일 뿐,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언제나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았고, 남주인공은 그런 여자를 살리면 그것으로 족한 인물이었다. 역사가 만들어낸 헤어짐이 남녀 간의 이별로만 국한되지 않고, 한 여인과 사내의 생애에 걸쳐 얼마나 큰 상흔을 남길 수 있는지 보여줬기에, 이후 병자호란을 비롯한 전쟁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N차 시청을 한 작품은 대만 드라마인 '상견니(想見你)'이다. 고등학교 시절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중국어를 공부했던 것이 너무 아까워서, 중화권 드라마를 일부로 찾아보던 시기가 있었다. 상견니 역시 그중 하나였다. 타임슬립, 뫼비우스의 띠로 얽힌 사건들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이 시청자들을 이야기 속 관계망에 가두는 작품이라, 따로 공부를 하면서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또 긍정적인 충격을 받는 것의 연속이었다. 음 쓰다 보니까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 그 작품들의 찬양글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 하겠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제발 전부 다 봐주면 좋겠다. 어떤 작품도 소홀하지 않고, 어떤 작품도 쉽게 시청자들을 놓아주지 않으니까. 남는 게 많을 거다.


아무튼 이렇게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히 연말에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속 인물들이 상을 받는 걸 보는 게 연례행사가 되었다. 올해는 sbs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2025년의 마지막 날을 sbs 연기대상과 함께 했다. 저녁 8시 50분에 시작한 시상식이 새벽 1시가 넘어서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이미 새해 기상목표는 물 건너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시상식은 참석한 배우와 스텝들에게 있어서 대면하지 못하는 사랑을 손에 쥐는 자리이다. 상이 가지는 상징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인정이기 때문이다. '당신, 우리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어'라는 인정 말이다. 나는 보는 사람으로서 늘 반사이익을 누렸다. 상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신인배우를 볼 때면, 사회초년생으로서, 무언가를 성취해 본 같은 한 사람으로서 매우 공감이 가기 때문에 나 또한 뭉클하다. 오랜 기간 무명생활을 했던 분들이 나오면 결국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군분투에 조건 없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상소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감사'인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깨닫게 만든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 잘나서 해낼 수 있는 것은 없고, 내가 알거나 혹은 알지 못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소중한 시간들을 나와 공유해 주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그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고, 손에 쥔 이 상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상 위의 사람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으면 나 역시 겸허해진다.

2025년 2월 말부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 멘탈을 잘 잡을 방법을 찾은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냥 멘탈은 흔들렸고 다만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해 주었다. 우리가 자격지심과 자기 연민을 느끼는 까닭은, 나보다 잘난 그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상상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괴리를 갖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나는 연예인만큼 멋지고, 가수에 버금갈 정도로 노래를 곧잘 하고, 그림도 나쁘지 않게 그리며, 누구보다 지혜롭고 현명하다. 사실 그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당연히 그 정도가 아니다. 감사일기를 쓰면, 내 곁에 있는 크고 작은 것들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에 나를 그리 높일 수가 없다. 자존감을 지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객관적인 내 모습을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걸 배웠다. 배우들의 수상소감에 가득한 그 감사들이 휘발되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 고이 자리 잡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026년은 뭔가 다르겠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나는 10년 전의 모습과 많이 다르고도 많이 비슷하다. 나쁜 습관은 여전하다. 2025년 12월 31일의 하루보다 2026년 1월 1일의 하루가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듯, 새해의 기쁨은 온전히 누리되, 모두 다 같은 나날들을 담담히 마주한다.







KakaoTalk_20260101_194841733.jpg 2년 전에 찍었던 해돋이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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