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차(夜叉)'라는 단어를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제목으로도 사용된 야차는 무언가 난폭하거나 좋지 못한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야차가 불교문화에서 요괴, 혹은 귀신의 한 무리였다는 것을 현대문화콘텐츠에서 필터링 없이 적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차가 마냥 나쁜 존재는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시기도 하였고,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면서까지 불법을 수호하고자 한 '충신(忠臣)'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야차는 어떤 존재일까? 미술문화 속 도깨비 스토리, 마지막 편에서는 친숙하면서도 생소한 존재 불교문화 속 아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제3화 : 또 다른 도깨비, 불교문화 속 야차
산스크리트어로 야크샤(यक्, yakṣa), 혹은 약차(藥叉)로도 불리는 야차는 고대 인도문화에서 특정한 신을 지칭하기보다는 초인적이거나 악마적인 존재를 두루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야차의 모티프는 인도 토속신앙에 등장하는 정령(精靈)인 약샤(yaksa), 약시(yaksī)로 보고 있는데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佛塔) 중 하나인 산치 스투파(Sānchī Stūpa) 등 고대 유적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약샤는 탑으로 진입하는 문(torana)에 새겨진 장식으로 표현되었는데 땅딸막한 난쟁이 형상으로 입이나 배꼽에서 연꽃과 연꽃 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처럼 연꽃을 뿜는 약샤의 모습을 통해 약샤가 나무와 광물의 신으로도 여겨졌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인도 토속신이었던 약샤는 자연스레 불교에 흡수되어 야차가 된다. 그리고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함께 중국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편찬된 불교 경전에서 야차의 모습과 성격이 정립된다. 난쟁이 요정으로써의 약샤가 야차라는 불교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다.
불교미술 속 야차의 도상적 특징 첫 번째는 바로 염주(念珠)이다. 석굴암을 포함한 여러 불교미술 속 야차는 염주를 물거나 쥐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야차는 본래 나무와 광물의 신인 약샤로 배꼽에서 연꽃과 연꽃 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약샤의 모습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계승되었고, 이것이 염주로 변화한다. 모두들 알다시피 염주를 만드는 주재료는 석재와 보석 등의 광물이나 말린 연꽃 씨이다. 이에 염주를 문 야차의 모습은 인도 약샤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미술 속 야차의 도상적 특징 두 번째는 불꽃처럼 뻗친 머리칼이다. 다른 불교신들이 민머리나 관모를 착용한 것에 반해 야차는 그 사례가 적고 머리카락이 위로 곤두서 있다. 불꽃 머리칼을 한 야차의 모습은 불교 경전 내용에 의거한다. 이는 중국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때 승려인 혜각(慧覺)이 번역한 『현우경(賢愚經)』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야차로 변한 모습이 서술되어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사문왕(毘沙門王)은 이런 사정을 알고, 그를 시험해 보려고 곧 몸을 변화시켜 야차로 변하였습니다. 얼굴빛은 검푸르고 눈은 피처럼 붉으며 개 이빨 같은 이빨은 위로 솟고 머리털은 곤두서고 입으로는 불을 뿜었다.
이처럼 야차로 변한 사천왕의 모습을 설명한 내용 중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불교미술로 표현되는 야차 머리칼이 위로 뻗친 이유를 알 수 있으며 돈황석굴(敦煌石窟) 벽화와 석굴암(石窟庵)의 사례처럼 머리칼이 위로 솟은 상들을 야차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야차의 특징은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신중(神衆), 즉 불보살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에게 적용된다. 신중이란 불법을 수호하고 호법신(護法神)인 동시에 부처님이 행하는 불법을 듣는 청중의 성격을 지닌 존재인데 인간이라기보다는 이질적인 모습을 한 이른바 인비인(人非人), 인간 같은 인간 아닌 인간 같은 존재로 반신반수(半神半獸)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신중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지는데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산신, 토지신,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천(飛天, 천인)도 큰 범주에서는 신중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전통적인 야차 도상을 차용한 사례는 지옥, 시왕(十王) 등 주로 죽음과 관련된 명부계(冥府界) 불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심판 받은 망자를 벌주는 귀왕이나 옥졸에게 뻗친 머리칼과 험상 궂은 야차의 모습이 보이곤 한다.
야차가 자칫 무서운 모습이기에 불교에서 악역을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야차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중 무리인 팔부중(八部衆, aṣṭau parṣadaḥ)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팔부중은 신중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신들로 야차를 포함한 용(龍, Naga)·천(天, Deva)·가루라(迦樓羅, Garuda)·아수라(阿修羅, Asura)·건달바(乾闥婆, Gandharva)·긴나라(緊那羅, Kimnara)·마후라가(摩睺羅伽, Mahoraga) 총 8명으로 구성된 집합체로 흔히 천룡팔부(天龍八部)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이들 역시 야차와 함께 인도 토속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부처를 호위하거나 설법을 듣는 신으로 변모하였고, 불교미술에서 빠지지 않는 존재로 위치하게 된다.
중국 당(唐)나라와 통일신라 등 고대 불교미술에서 보이는 팔부중은 불교경전 내용을 반영하듯 각자의 특성을 잘 반영한 모습이었지만 시기에 따라 그 형태가 점점 변하기에 이른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또한 팔부중의 일원으로써 야차가 등장하는 조선시대 불교미술 주제는 바로 불화이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듣는 성격을 반영하듯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와 같은 설법도 계열의 불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대부분 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로 금강역사(金剛力士), 용왕(龍王)·용녀(龍女)와 함께 배치된다.
여기서 야차는 사자(師子, Lion) 모양의 관을 쓴 음악의 신 건달바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처음 불화를 접한 사람들은 이 많은 신들 가운데 누가 야차인지 모를 것이다. 그렇다. 모르는 것이 어쩌면 정상일 것이다. 조선시대 불화에 표현된 야차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불화 속 야차는 이전 불꽃 머리칼을 휘날리는 매서운 모습이 아니라 새하얀 코끼리 모양의 관을 쓰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코끼리 관을 착용한 야차의 모습은 16세기 정도에 제작된 불화부터 등장하기에 꽤 이른 시기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야차가 코끼리 형태의 관을 쓰고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쎄, 현재 미술사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뚜렷한 연구 성과가 없기에 명쾌한 해답은 아직까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사자와 코끼리라는 동물의 조합이다. 불교문화 속 사자와 코끼리의 조합은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시작된 꽤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곧 석가모니 부처의 일등 보좌관이자 최고의 보살인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지혜, 보현보살은 자비와 실천행의 상징으로써 각기 지혜와 자비실천을 상징하는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7세기경 중국 당(唐) 나라에서 활동한 인도 출신의 승려 아지구다(阿地瞿多, 생몰미상)가 번역한 『불설다라니집경(佛說陀羅尼集經)』은 문수·보현보살, 사자·코끼리 조합이 언급된 가장 빠른 사례로 알려져 있다.
왼쪽 아래에는 몸은 모두 백색이고 정수리 뒤에는 광명이 있으며, 칠보영락(七寶瓔珞)으로 된 보관을 쓰고 천의를 입고 온갖 장엄을 하고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사리보살을 그린다. 오른쪽에는 앞에서와 같이 장엄하되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상을 그린다.
위에서 말하다시피 이 조합은 인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인도에서 사자는 석가모니 부처 그 자체를 나타내는 백수의 왕이었으며 코끼리는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알려주는 예지와 태몽(胎夢)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사자와 코끼리가 각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아마도 두 동물이 불교의 시작점인 인도 현지에 서식한다는 점, 그리고 예로부터 인도의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는 부분을 착안해 석가모니 부처를 보좌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보살의 꾸미면서 좌우 대칭을 맞추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그럴싸한 예시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동양문화에서 좌우를 상징하는 용과 호랑이 같은 존재 말이다. 이에 설법도에 등장하는 야차 역시 본래 사자관을 쓰고 등장하는 건달바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코끼리 관을 쓴 채로 등장하게 하여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을 그리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미술이라는 종교미술의 보수성이다. 위에서 끊임없이 언급하였지만 본래 불교미술은 경전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며 그 전통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불상 하나를 조성할 때도 무려 80여 가지의 조건이 있듯이 신중 역시 경전에 나오는 생김새를 토대로 제작하는 것이 응당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불화에 등장하는 코끼리 관을 착용한 야차는 너무나도 쉽게 그 규범을 깨버린 것이 아닌가? 온갖 종교의 캐릭터들이 불교로 스며드는 조선후기가 아닌데도 말이다. 도대체 이 상황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당시 불화를 그렸던 스님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기에는 이르다. 당시 불화를 그린 계층들은 대부분 스님이다. 불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이해하셨던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차의 모습을 바꾼 것은 분명 그에 맞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 살펴보았듯이 야차는 어떠한 특정 신을 뜻하기보다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많이 비추어졌다. 이 야차라는 단어 자체가 초인적이고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존재를 포괄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이에 신은 물론이요, 제석천(帝釋天), 사천왕(四天王) 등 신중 가운데 꽤 높은 지위에 있던 도상들도 야차라고 지칭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부처님조차 야차라고 불리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차는 그 의미부터 굉장히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유분방한 성격은 단어뿐만이 아니다. 야차는 그 형태 또한 자유롭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불교 사천왕이 밟고 있는 일명 생령(生靈)이다. 사찰에 방문하면 불법을 수호하는 네 수호신, 즉 사천왕이 위치한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사천왕상을 자세히 보면 살아있는 무언가를 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이 악한 존재이며 이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이 존재를 밟으면서 복종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생령은 불교가 시작된 인도부터 시작되는데 가장 이른 사례는 기원전 1세기 경에 제작된 사천왕의 전신인 쿠베라 야차(Kupiro yakho)이다. 조각에 새겨진 명문 기록으로 이 상이 북방을 지키는 쿠베라 야차이며 사천왕이 야차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사천왕과 더불어 사찰 문을 지키는 근육질의 금강역사 역시 여러 불교 경전 내용을 통해 야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깐 불교문화에는 수많은 야차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사천왕으로, 또 한 명은 금강역사로 레벨 업을 하였으며 그 와중에서도 야차족만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은 팔부중의 일원으로 채택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야차가 초고속 승진을 한 사례인 것이다.
또한, 『아타바구다라니경(阿咤婆拘陀羅尼經)』에 수록된 기록 중 "사천왕이 발아래 야차를 밟고 있다."는 내용을 통해 사천왕이 밟고 있는 이 상이 실은 악귀가 아니라 수많은 야차족 중 하나, 즉 사천왕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국, 사천왕이 밟고 있는 생령은 결국 야차이며, 그 의미는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막는 것이 아니라 사천왕이 제대로 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받치는 보좌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생령이 양손을 어깨까지 올려 사천왕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도 적지 않다.
생령 역할을 하는 야차의 모습은 다양하다. 청도 운문사(雲門寺) 작압전(鵲鴨殿)의 석주처럼 두 뿔이 달린 도깨비의 모습을 하는가 하면 석굴암 사천왕처럼 뱀을 두른 역사로 표현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특이한 사례는 바로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사례는 중국 수(隋) 나라 때 제작된 신덕사(神德寺) 사리기와 통일신라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삼층석탑 출토 사리기로 알려져 있다. 두 사리기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각기 양과 사슴으로 추정되는 동물이 생령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야차는 동물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대길의신주경(大吉義神呪經)』이라는 불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확인된다.
모든 야차와 나찰귀(羅刹鬼)는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사자·코끼리·범·사슴·말·소·나귀·낙타·양의 모양, 혹은 머리는 큰데 몸은 여위고 작거나 혹은 푸른 모습이거나 혹은 때로 배가 붉고 머리는 하나인데 얼굴이 둘이거나 혹은 얼굴이 셋이거나 혹 때로는 얼굴이 넷입니다. 머리는 사자의 털과 같은 거친 털이 드리워져 있거나 혹은 또 머리가 둘이거나 혹은 또 머리가 잘리거나 혹 때로는 눈은 하나이고 톱니 같은 이빨이 길게 나오고 거친 입술이 아래로 쳐져 있거나 혹은 또 코가 높이 솟거나 혹은 또 귀가 크게 늘어지거나 혹은 또 목이 길어서 이러한 이상한 모습으로 세상을 두렵게 합니다.
그렇다. 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야차는 사자이던, 사슴이던, 양이던, 코끼리던 간에 어떠한 형상으로도 변할 수 있는 변신의 귀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불화에 표현된 코끼리 관을 쓴 야차의 모습은 결코 어색한 현상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야차는 사슴이기도, 도깨비이기도 한 신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에서 살펴본 『대길의신주경』 내용에 코끼리까지 언급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안성맞춤이 아닌가? 좌우 대칭을 맞추기 위함에도, 야차의 자유로운 모습을 표현하기에도 알맞은 상황이 아니던가!! 이에 코끼리 관을 쓴 야차의 모습은 야차 고유의 성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불교를 대표하는 동물 형상으로 건달바와 짝을 이루게 한 조선시대 화승만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술문화 속 도깨비 스토리를 장황하게 살펴보았다. 우리 민족 정서에 깊이 서려 있는 민속의 도깨비 신앙부터 기와 속의 웃는 귀면, 그리고 불교문화 속 도깨비인 야차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그 형상과 의미는 다르지만 이 모든 도깨비들이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항상 같이 있는 것은 동일하다. 주말에 시간이 될 때 사찰을 가보자. 그리고 도깨비를 찾아보자. 반드시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반겨줄 것이다.
※ 요새 본 업무와 10월에 출간될 불교미술 속 동물문양 관련 단행본 준비 때문에 활동이 뜸했습니다. 이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업로드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