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우리는 늘 더 많이 보려고 합니다. 눈은 화려함을 좇고, 귀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하며, 입은 새로운 맛을 찾습니다. 그런데 보는 것이 많아질수록 삶이 더 풍요로워질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분주해집니다. 눈이 바쁠수록 생각은 쉬지 못합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오미는 사람의 입맛을 어그러지게 한다.”
감각은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오래 머물면 방향을 흐립니다. 자극은 강해질수록 만족은 짧아지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조용히 방향을 바꿉니다.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배’는 단순히 먹는 기관이 아닙니다. 삶이 머무는 중심, 존재가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눈은 바깥을 향하고, 배는 안쪽을 압니다. 눈은 비교하게 만들고, 배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고요. 화려한 것을 내려놓고 필요한 것을 붙드는 선택, 보이는 만족보다 지탱해 주는 충족을 택하는 지혜입니다.
오늘의 삶은 눈을 너무 쉽게 피곤하게 합니다. 화면은 점점 선명해지는데, 관계의 온도는 흐려집니다. 볼 것은 넘쳐나지만 머물 곳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덜 보아야 비로소 숨을 쉽니다. 덜 가지면 오히려 단단해집니다.
예수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말라.”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보이기 위한 신앙은 눈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배의 신앙, 중심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사랑이 머물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외형의 승리가 아니라 내면의 순종이었습니다. 보여지는 성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실함이 세상을 살렸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눈에서 배로 옮겨가야 합니다. 보이는 열심보다 들리지 않는 진심으로, 화려한 언어보다 조용한 순종으로.
눈을 비우면 욕망이 잠잠해지고, 배를 채우면 은혜가 머뭅니다. 하나님은 눈의 화려함보다 배의 고요함 속에 조용히 임하십니다.
눈은 세상을 좇고, 배는 생명을 기억합니다. 덜 보는 것이 길이 되고, 비워진 중심에서 진실은 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