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이야기
사람은 늘 선을 말합니다. 옳은 것을 말하고, 바른 기준을 세우고, 정의를 외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이 강조될수록 세상은 더 거칠어집니다. 법은 늘어나고, 규칙은 촘촘해지는데 사람들은 더 피곤해집니다.
노자는 이 역설을 아주 담담하게 말합니다. 큰 도가 사라지자 어짊과 바름이 말해졌고, 지혜가 드러나자 큰 거짓이 생겼다고. 가족이 화목하지 않으니 효와 자애를 말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니 충신이 생겼다고.
노자는 이 덕목들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들이 언제 등장하는지를 묻습니다. 도(道)가 살아 있을 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던 것들, 사랑이 흐를 때는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던 것들. 그것들이 말로 등장했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흐르지 않자 사람들은 대안을 만들었습니다. 사랑이 약해지자 인의를 말했고, 신뢰가 무너지자 규칙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대안은 언제나 인위적입니다. 무너진 질서를 복구하려고 만든 장치가 곧 새로운 속박이 됩니다.
도는 사람을 억누르지 않지만, 인의는 기준을 세워 사람을 가릅니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법이 늘어나고, 신뢰가 사라진 자리에 감시가 생깁니다.
노자가 보기에 이것은 타락이 아니라 증상입니다. 근원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자리를 대체물로 메우고 있을 뿐입니다.
공자는 무너진 질서를 붙들기 위해 인의예지를 세웠습니다. 그 시도는 필요했고,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한 걸음 더 물러섭니다. 그 약속이 목적이 되는 순간, 도는 이미 사라졌다고.
문명은 처음엔 사람을 보호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 위에 올라섰습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었지만 이제 사람은 법에 맞추어 존재해야 합니다. 예의는 존중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체면과 위계의 장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더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비교하지 않던 시절, 앞서려 하지 않던 시간, 법보다 마음이 사람을 묶던 때. 그때는 효를 말할 필요도, 충성을 외칠 이유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선악과 사건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판단의 주체가 되고 싶었던 욕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인간은 스스로 선을 정하고, 악을 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선은 늘 누군가를 밀어냈고, 사람이 세운 정의는 늘 누군가를 상처 입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랑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사랑은 규정을 넘는 관계이며,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형벌의 장면이 아니라, 잃어버린 도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노자가 말한 ‘큰 도로의 회귀’는 성경이 말하는 에덴의 회복과 닮아 있습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다시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자리.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인의를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이미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라지면 선이 말해지고, 사랑이 사라지면 법이 늘어납니다. 하나님은 법보다 깊은 곳에서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