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우리는 손에 무언가를 쥐어야 안심합니다. 힘을 쥐고, 관계를 쥐고, 미래를 쥐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쥐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더 빨리 빠져나갑니다.
노자는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얻고자 하여 그렇게 하면 오히려 얻지 못한다고.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세상을 ‘신묘한 그릇’이라 부릅니다. 그릇은 조심히 다뤄야 하고 담아야지 쥐어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손을 대면 금이 가고, 욕심으로 움켜쥐면 흘러버립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합니다. 하려 들면 망하고, 붙잡으면 잃는다고.
이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세상에는 앞서갈 때가 있고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숨을 내쉴 때가 있고 들이마실 때가 있습니다. 강해질 때가 있고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조절되며 자기 리듬을 가집니다.
문제는 그 리듬을 참지 못할 때입니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크게, 조금 더 확실하게. 그 ‘조금 더’가 삶을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의 태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리고, 지나친 것을 버린다고. 성인은 적게 가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과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덜 쥐고 더 오래 머무는 사람. 통제하지 않고 흐름을 읽는 사람입니다.
신앙도 이 자리에서 흔들립니다.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내 계획 안에 가두려는 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사실은 결과를 쥐려 하고, 순종한다고 말하면서도 방향은 내가 정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쥐지 않았습니다. 맡겼습니다. 붙들지 않았습니다.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세우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분 안에서 무너진 관계들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바벨탑은 쥐려는 인간의 상징이었고, 십자가는 내려놓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흙은 쥐면 흘러내리지만 심으면 살아납니다. 신앙은 붙잡는 기술이 아니라 심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쥐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일입니다. 자라게 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몫입니다.
세상은 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품어야 할 질서입니다. 붙잡지 않을 때 비로소 잃었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