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고대 이집트인들은
내세의 삶을 위해 사람이 죽으면 미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세를 넘어선 내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현세를 내세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던
삶에 대한 지독한 집착에 가까웠다고 한다.
생각을 조금 바꿔 보면,
내세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원관의 일부이기도 하다.
종교와 신앙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기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직접 겪어본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같은 일을 겪고서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른데,
하물며 내세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한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중세 유럽에 대한 낭만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귀족이거나 그와 비슷한 신분으로
전생이든 회귀든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상상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꽤 잔인한 팩트가 하나 있다.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길거리의 진흙과 오물 속을 기어 다니는
천민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내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떤 말로도 꾸며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그 말에 미혹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기대를 이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말하는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야훼의 실시간 동행이 그랬고,
예수의 현현이 그러했다.
형태만 보면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하나는 심리적·물리적 평안을 약속하는 나라처럼 보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의 전환과 정신적 승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곧 약자가 약자로서 당하고 시달리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세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다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구원과 내세를 핑계로
현세에 대한 집착을
경건한 말로 포장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