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불교에는 가장 깊은 지옥이 있다고 한다.
무간도라는 지옥이다.
고통이 잠시도 끊이지 않는 자리.
숨을 고를 틈조차 없이 고통이 밀려와 덮치는 자리.
벌칙이라기보다, 고통 그 자체가 무한히 반복되는 자리다.
성경에는 그와 똑같은 구조를 가진 개념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게헨나,
하나님과의 최종적 단절이라는 그 풍경은 무간도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살다 보니,
무간도 같은 게헨나 같은 현세를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간다.
단순히
먹고 살기 힘들어서, 꿈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아픈 사람들이다.
몸이든 마음이든
고통이 끊이지 않고, 밤이 깊어도 아픔은 멈추지 않고,
때로는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는 말조차 무기력하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죽을 수도 없다.
법이 허락하지 않고, 윤리적 경계가 막아서는 것도 있지만,
누군가를 남겨두고 갈 수 없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꺼진 생명은 너무 쉽게 지워버리면서도,
정작 살아 있는 이는 죽지도 못한 채 버텨야 하는 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너무나 잔인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사랑은 짐을 같이 지는 것이라고.
고통을 함께 겪는 것이라고.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고통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 아플 수 없다.
아픔의 감각은 타자가 나눠 들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때때로 오만이 되고,
어떤 순간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고통을 견디는 사람의 수치심과 미안함을 비껴간 채로
그 옆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안락사 역시도 이 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사람의 고통을 끝내주겠다는 마음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혹시 그것도 타자의 고통을 내 해석으로 설명하고,
내 판단으로 종결하는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선택하거나 선택당하는 과정조차
당사자의 절규, 두려움, 아직 말하지 못한 마음,
“나는 아직 여기 있다”는 마지막 미세한 흔들림을
너무 쉽게 덮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어떤 개입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타자의 고통을 내 방식으로 처리해버리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은 고통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타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울고, 무너지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쇼를 하든 난리를 치든
그 모든 것을 방해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문을 닫아주는 공간.
그리고 사랑은 그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그 공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사람이 자기 방식으로 고통을 견디도록
그 자리를 지켜주는 일.
사랑은
타자의 고통을 대신해주는 능력이 아니다.
타자의 고통에 의미를 덧씌우는 힘도 아니다.
사랑은
고독을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침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백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사랑은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고통을 자기 방식으로 견딜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공간 밖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폭력이 되지 않으면서도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는 그 희미하지만 단단한 지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