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뒤에 남는 것

주절주절

by 이지

(정서적 정년퇴직을 맞이한 마흔여섯의 응석)

“할 거 다 한 기분이랄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든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고, 자폐가 있는 아들을 키워낸 시간.
누군가는 그 시간을 숭고한 헌신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그 시간은 매일이 생존을 건 전쟁에 가까웠다.

물론 그 시간을 가장 오래 버텨낸 사람은 어머니였다.
나는 그 곁에서 거드는 사람에 가까웠고,
동생도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보탰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나에게도 분명 하나의 싸움이었다.

이제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아버지는 떠났고,
아들은 조금씩 자기 몫의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찾아온 것은 안도나 기쁨이 아니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텅 빈 상태였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간다.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성취를 하고,
또 무언가를 갈망하며 앞으로 달려간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철저히 동떨어진 섬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뒤처졌다는 조바심 때문은 아니다.
그저 내 안의 엔진이 이미 다 타버려
더 이상 태울 연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흔여섯.
나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정서적 정년퇴직’을 맞은 기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서
삶과 믿음에 대해 말을 건네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입을 통해 나오는 그 말들이
오히려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삶의 밑바닥 이었던 것 같은 곳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나니
허공을 맴도는 말들 앞에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러다 진짜 사기꾼이 되는 건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내 육신은 이미 많이 닳아버린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말을 빚어낼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문득 성경 속 탕자의 비유가 떠오른다.
집을 떠났던 둘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다.
그때 밭에서 일하던 큰아들은 분노한다.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으시더니.”

사람들은 종종 그를 편협한 인물로 읽지만
요즘의 나는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그의 서러움은 동생에 대한 질투라기보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사람에게 찾아오는 허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 큰아들의 마음 한켠에 서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나는 잠시 멈춰 서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말했다.
“도는 담담하여 맛이 없다.”

졸저 《노자 예수 그리고 신앙》에 적어 두었던 이 문장이
요즘 들어 자주 떠오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텅 빈 무기력은
억지로 동력을 만들어내던 유위의 삶이 끝났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잠시 짐을 내려놓고 서 있으려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멈춤 또한 삶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다시 아주 조용한 걸음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