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려다
자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쉰네 번째 이야기

by 이지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는 늘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따라옵니다. 고통이 없고 불평등이 없고 모두가 조화롭게 사는 세상 말입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일하고 공정하게 나누며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그 꿈은 늘 어딘가에서 무너졌습니다. 공동선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억압이 생기고, 평등이라는 제도 속에서 다른 형태의 차별이 만들어집니다. 이상은 아름답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도 사실은 아이러니합니다. 그 뜻은 “없는 곳(ou-topos)”이니까요. 완벽한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에는 그런 장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롭습니다.

노자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봅니다. 그는 말합니다.

“도를 닦아 자신에게 쓰면 그 덕이 참되고 집에 쓰면 넉넉하며 나라에 쓰면 풍요롭다.”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닦으라는 말입니다. 노자는 거대한 이상국가를 설계하지 않습니다. 대신 ‘닦는다(修)’는 말을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대한 제도나 거창한 사상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도를 자신에게 쓰면 덕이 참되고, 집에 쓰면 관계가 넉넉해지고, 마을에 쓰면 공동체가 자라며, 나라에 쓰면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그 덕이 퍼지면 세상 전체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노자가 말한 ‘닦는다’는 말은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그 어원에는 “피가 나도록 다듬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이 아니라 내면을 깎고 다듬는 일입니다. 그래서 덕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자랍니다.

사람은 종종 완전한 사회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완전함은 때로 다양성을 억누릅니다. “모두 같아야 한다”는 선한 의도가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노자는 그런 완전함을 경계합니다. 그에게 도는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흐르는 원리입니다.그래서 도는 획일적인 윤리가 아니라 적절함의 윤리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가장 알맞게 반응하는 지혜, 그것이 노자가 말한 덕입니다.

비트겐슈타인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삶의 형식이 다르면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세상은 하나의 규칙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작은 세계를 깊이 이해할 때 큰 세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노자가 말한 “이것으로 저것을 안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신앙도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성경은 완전한 책이지만 그 완전함은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가 고갈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매일 읽어도 새롭고 평생 연구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은 완벽한 결과가 아니라 완전함으로 우리를 이끄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자라나 새들이 깃드는 큰 숲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자라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신앙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라 닦아가는 일입니다. 하루하루 다듬어 가는 삶. 그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조용히 자랍니다.


사유의 한마디

완전함은 도착점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닦는다는 것은 모자람을 인정하고 다시 다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계속 닦아가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길이 도의 길이며 복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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