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결정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멈칫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무언가를 듣고 결정하는 존재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은 생각보다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미 마음은 기울어져 있고,
이성은 그 선택을 설명하는 데 더 능숙하다.
심리학은 말한다.
사람은 먼저 선택하고, 나중에 이유를 만든다고.
우리는
무언가를 정확히 들은 후에 움직이기보다,
이미 움직이고 난 뒤에
그 움직임을 이해하려 애쓰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고민을 해도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는
이미 기울어져 있는 방향으로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말한다.
“응답 받았다.”
이 말이 틀렸다고 단정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그 말이 너무 쉽게 사용될 때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 말은 책임을 흐리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하니까.
“비전이 뭐야?”
얼마 전, 내 앞으로의 행보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이
어딘가 나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다가왔다.
지금 당장 명확한 방향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그 방향이
그럴듯한 언어로 정리되어야 한다는 요구.
그 순간 조금 짜증이 났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분노도 올라왔다.
왜 우리는 아직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완성된 지도를 요구하는 걸까.
비전.
그럴듯한 말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 하나님이 주신 그림, 부르심의 구체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비전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일 때가 많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방향.
그것들이 모여 “비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그 책임이 무거워질 때마다
외부의 이유를 찾는다.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그랬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 말들 속에는
책임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보여준다.
사람은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주 틀린다.
야곱은 계산하며 살았고,
다윗은 욕망으로 무너졌고,
바울은 확신 속에서 교회를 핍박했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성향대로 움직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선택을 버리지 않으셨다.
틀린 선택조차 신앙 역사의 재료로 사용하셨다.
성경은 옳은 선택을 한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다.
어긋난 선택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그럼에도 이야기가 계속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사람은 반복해서 빗나가지만,
하나님은 그 빗나감을 끊어내지 않고 이야기 안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그래서 성경은 포기되지 않는 선택들의 기록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계획한다.
우리는 선택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신앙을 이렇게 이해한다.
신앙은 정확히 들었다는 확신이 아니라,
내 선택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지켜보는 태도에 가깝다고.
성경 속 인물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선명한 비전을 붙잡고 살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떠났고,
모세는 부르심 앞에서 도망치려 했고,
요나는 아예 반대로 갔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그때그때 이어지는 걸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전을 이렇게 이해한다.
미리 주어진 청사진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드러나는 방향.
처음부터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이해되는 것.
어쩌면 우리는
비전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전을 해석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선택하고, 실패하고, 다시 선택하면서
나중에 돌아봤을 때 “이 길이었구나”라고 말하게 되는 것.
그래서 나는 쉽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건 하나님이 주신 응답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주신 비전입니다.”
그 말 대신 이 정도로 남겨두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엮어 가실지를 지켜보고 있다고.
어쩌면 신앙은 확신을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해석을 낮추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