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다섯입니다

by Yonuk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옷들을 툭툭 털어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고 있을 때였다. 작은 할머니가 초록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작은 키에 앙다문 입만 보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작은 할머니는 늘 잘 웃고 쾌활한 분이셨다. 인사를 하고 화단 앞에서 놀고 있던 동생들에게로 갔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주 참새가 따로 없는 듯했다. 두 분의 대화에 시끄러움이 될까 봐 동생들에게 조용히 하자고 말할 때쯤 엄마의 격앙된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작은 할머니는 이 시간에 왜 오셨을까? 왜 갑자기 나와 동생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신 걸까?


"예, 작은 어무이예. 지는 딸만 다섯입니더!"

"니! 니가 지금 내한테? 이기 머하는 기고? 니가 지금 내한테 댐비는 기가?"

"......"

"하이고 살다 살다 내 조카매느리한테 이래 당하기는 또 첨이대이. 아이고 야가 나를 무시하는갑네!"

"작은 어무이, 그기 아이고예. 지가 잘못했심니더. 고마 다 지가 잘못했심니더예."

"내는 더는 니한테 들을 말도 엄꼬! 느그 작은 아부지한테 가가 다 말할라카이 그래 알기라!"


철대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작은 할머니는 나가셨고 화단 앞 증조할머니 때부터 쓰시던 맷돌이 놓인 자리에 철퍼덕 넋을 잃고 주저앉은 엄마는 계속 흐느껴 울고 계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일에 대해 나와 동생들은 어리둥절했고 엄마가 울고 있으니 어린 동생들은 하나같이 엄마에게 달려가 안겨서 같이 울고 있었다. 사루비아(샐비어)에서 나오는 꿀을 쏙쏙 빨아먹고 있던 동생들 입 주변엔 아직도 꽃잎이 붙어 있는 걸 보니 많이 놀랐겠구나 싶었다. 나는 두 분이서 짧은 시간 동안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작은 할머니가 했던 말은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아마도 엄마는 그 말에 마음이 상해서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피며 힘주어 말했을 것 같았다.


"하이고, 가시나들만 쭈르륵 낳아가 우얄라카노 어이? 무시마 하나 없이 이래 가시나들만 있다 아이가!"

"......, 예, 작은 어무이예. 지는 딸만 다섯입니더!"


그날 밤 작은 고모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들었던 나는 아래쪽 마을에 있던 작은 할아버지네도 들썩들썩 야단이겠구나 싶었다. 늦은 밤 우리 집도 그리 조용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마음 풀고 참아라, 내일 날이 밝으면 쌀 한 바가지 담아 죄송하다고 가서 찾아뵙고 오라며 엄마를 감싸고 계셨다. 할머니가 엄마의 등짝을 쓸어내리며 톡톡 두드려주고 계실 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할머니의 눈동자가 떨리며 눈물이 맺혀있음을 보았다. 아, 엄마는 괴롭고 서러웠을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도 맏이, 할아버지도 맏이, 아버지도 맏이...... 그런데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고 작년에 또 딸을 낳은 딸딸딸딸딸 엄마가 되어 있었다. 제사 지낸다고 음식을 도와드리던 일이 명절을 제외하고 한해의 절반은 되었던 듯했다. 집성촌이다 보니 제사 음식도 많이 준비했어야 했다. 그 일을 엄마는 늘 묵묵히 해오셨다. 할머니와 엄마, 고부간의 사이는 좋았다. 할머니는 집안의 과수원 일을 도맡아 하는 엄마를 대신해 우리를 보살피고 집안일을 하셨다. 시어머니도 행여 며느리가 마음에 부담이 될까 상처가 될까 해서 손자 얘기를 하지 않으시는데 마냥 유쾌 작은 할머니는 그냥 툭 말씀을 해버리신 거였다. 이 작은 시골 집성촌에서 아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딸의 존재는? 나와 동생들의 존재는 무엇일까? 속이 시끄럽다는 말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걸까? 아들보다 먼저 태어나버린 우리들, 딸만 다섯이 내게도 부담스러워졌다. 왜 이런 느낌을 받아야 하는 걸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작은 할머니가 싫어졌다.


"어무이예, 지한테는 저것들 다섯이 중요함니더. 지 배 아파가 난 새끼들인데 우째 안 귀하겠심니꺼."

"오야, 내가 와 모리겠노. 니 맴 다 안다. 그라이끼네 고마 마음 풀그라."

"어무이예......, 어무이예......, 지송함니더."

"괘안타. 니가 뭐를 잘못했노? 지송할끼 어데 있노? 내는 니도, 손녀들도 다 중한기라."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두 분이 앉아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날 후로 심부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작은 할머니 댁에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이 지나 봄이 되었을 때

작은 고모가 찾아왔다. 구부러진 허리로 장독들을 닦고 계시는 할머니에겐 "큰 엄마, 숙이 왔어예." 인사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밀가루를 꺼내더니 부뚜막에 걸터앉아 반죽을 하고 있었다. 작은 고모와 함께 호떡과 진달래 화전을 부치며 아궁이에 불을 쬐고 앉아 있자니 그날이 다시 떠올려졌다.


"욱아, 우리 엄마가 말이 좀 많다 아이가."

"......, 고모야, 내 거 있잖아, 내가 먹을 화전에는 진달래 꽃잎 두 개 올리도고, 알았제?"


작은 고모는 특별히 내가 먹을 화전에 진달래 꽃잎을 두 장 얹어주었고 서로 피식 웃으며 장사하러 나가도 될 만큼의 호떡과 화전을 담아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나가 앉았다. 엄마는 여전히 밭에 일하러 가셨고 할머니는 뒷마당 장독들을 닦고 대청마루에 앉아 마른걸레질을 하고 계셨다. 우리 집, 딸만 다섯들은 모두 호떡과 화전에 푹 빠져 또 그렇게 봄날 햇볕을 쬐었다. 아무래도 봄날은 쌀쌀함을 감춘 따스함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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