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참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밭 입구에 다다랐을 때 누렇고 거무스름한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 어쩌나 시원한 국수가 자꾸만 데워지는 듯한데 저 징그러운 뱀 놈은 움찔함도 없이 대가리를 내밀고 있다.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욱이 왔어요! 시원한 국수 갖고 왔는데......요. 아......'
넓디넓은 디쁜디기 밭에 햇빛 받아 반짝이는 복숭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어서 오라 반기지만 곁으로 갈 수 없다. 눈을 감고 백번만 세어 보자 하고 주먹을 꾹 쥐자마자 덜덜덜 떨리는 몸 아래로 징그런 뱀 놈이 스르륵 장화 신은 내 발을 스치며 지나간다. 고조할매도 있고 증조할배도 누워계시는 디쁜디기 밭 입구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를 수십 번 속으로 곱씹었다. 그래, 독사가 아닌 게 어디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는 둘둘 말린 신문지 뭉치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걸어오며 어서 오라, 여기에 앉자, 국수 묵자 하신다. 아버지 몸보신용 뱀 한 마리, 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아찔함에 갇혀 신문지에 말려 있었다. 디쁜디기는 뱀 천지다. 뒷산 자락 밑에 자리한 복숭밭은 봄이면 매실 따고 여름이면 복숭 따고 가을이면 감 따고 사과 따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내주었던 고마운 밭이다. 그래도 나는 무더운 여름날 할매 할배 산소에 드러누워 억세진 삐비를 꺾어 돌리며 수박 냄새나는 풀로 코 간지럽히는 혼자만의 시간이 제일 좋았다. 봄날 삐비는 껌처럼 달달한 맛도 나고 씹어먹는 재미도 주면서 그 후로 꽃이 피어 은물결을 만들어내는 재주도 지닌 풀이다. 계절마다 멋짐을 뿜어내던 디쁜디기에 뱀은 참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아버지는 그 뱀을 어떻게 드셨을까? 대청마루 밑엔 일제강점기 때 순경이던 할배가 숨어 지냈고 6.25 땐 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숨어 지냈다던 아주 낮은 지하공간이 있다. 지금은 그 공간에 온갖 다양한 뱀들이 기다란 옛날 지름병에 담긴 뱀소주가 되어 있고. 그 뱀술도 다 드시지 않았는데 엄마는 또 뱀을 잡았다. 디쁜디기는 뱀이 살기에 천국과 같은 곳이다. 적당한 습도와 그늘진 곳이 많고 계곡물도 여름이면 늘 시원하게 흐르는 데다 뒷산 자락이 가까이하고 있어 뱀에게는 여기저기 마실 다니기에 좋은 교차로였을지도 모른다. 봄날 고사리 딸 때도 옆으로 스르륵 지나가는 이름 모를 뱀들, 그러고 보니 우린 이웃이었나 싶다. 불편하고 소름 돋는 이웃 말이다. 며칠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엄마가 잡은 뱀은 독사였다. 풀이 너무 잘 자라 낫으로 풀치기를 하고 있는데 엄마도 위험할 뻔했단다. 그 상황을 듣고 있던 중에 닭살이 돋아나면서 부르르 절로 몸이 떨렸다. 촌에는 징그럽고 무서운 이름 모를 이상한 것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런데 그 이상한 것들이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는 거라고,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밭에 갈 때면 늘 무릎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를 신고 가야 함을 특히 여름날엔 더욱더 따끔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디쁜디기의 뜻은 무엇일까? 여쭤봐도 그냥 예전부터 그렇게 불려 왔다고만 하셨다. 유덕화가 시원하게 웃고 있는 표지를 넘겨 누런 연습장에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보았던 디-쁜-디-기-는 그날 이후로 내겐 <깊은 그리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