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교시 수업은 담임선생님의 수학 시간이다.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맨 뒷자리에 있던 나를 부르셨다. 아침 조회 시간을 놓쳐 수업시간에 조회시간이 더해졌다.
"욱아, 어머님은...... 우째 동생 잘 태어났나?"
"예......"
"그래, 저, 거, 그래...... 동생이?"
"아들 낳으셨어요."
그렇다, 아들 필요한 집에 딸만 다섯으로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 난 꽤나 관심사였다. 선생님은 두 주먹을 불끈 쥐시고는 교탁을 탁탁 치시면서 "음, 음, 그래, 그래, 인자 마 됐다, 고마 된기라"라고 하셨다. 매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선생님들은 드디어 남동생이 생겼구나 하며 인사를 해주셨다. 심지어 뒷반 수업시간에도 큰소리로 축하해 주셨다. 무더운 여름이 슬슬 오고 있는 계절이었다. 대부분 교실에서는 창문과 교실 출입문까지 모두 열어놓고 수업을 했기에 뒷반 선생님의 축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후로 선생님들로부터 나는 '육남매'로 또 친구들 사이에선 '욱이 이모'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냇동생과 열세 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아, 나는 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가서 한 살이 어린 동급생이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몰려와서 친절하게 나이 차이를 계산해 주고 갔다. 그러면서 누나가 되기엔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하며 그냥 막내 이모 정도가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욱이 이모,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엄마는 넷째를 낳은 병원에서 여섯째, 막내를 낳으셨다. 며칠 있으면 다시 시골집으로 내려가실 텐데 하며 수업이 끝난 후 곧장 병원으로 갔다.
산부인과 병원은 둘째 동생이 다닌 유치원 언덕 아래쪽 대로변에 위치해 있고 그 유치원은 우리들이 다닌 국민학교 교문 맞은편에 자리해 있는 곳이다. 하교 후 친구들과 봉봉(대형 트램펄린)을 타러 가던 지름길 입구 옆에는 단골 문방구도 있어서 나름대로 정다웠던 골목길의 시선들이 느껴지는 곳이다. 분명히 문방구 아주머니도 궁금해하실 것 같았다. 그 시절, 나와 동생들에게 외상장부를 허락해 주셨던 분이셨다. 시골에 계신 엄마에겐 방학 중에만 다니러 갈 수 있었고 학기 중에는 할머니가 우리를 보살펴주셨던 것 그리고 아버지는 시내버스 운전을 교대로 하시니 준비물을 챙겨줄 상황이 못되었던 터라 1학년 운동회가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문방구 앞에서 서성이며 있을 때 엄마와 아주머니는 짧은 대화를 나누셨고 그 이후로 우린 외상장부에 이름을 올린 자매들이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 준비물을 문방구 아주머니는 그 많은 아이들을 뒤로하고 잘 챙겨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어찌 보면 큰 이모와 같았던 분이기에 감사의 마음으로 제철과일과 여러 채소들을 갖다 드리며 친척 같은 마음으로 지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에 학생들이 너무 많아지자 분교를 하게 됐다. 학기 중에 동생들은 집 바로 앞에 생긴 국민학교로 가게 되었다. 전학도 아닌 것이 참 희한했다. 그렇게 학교를 옮겨서 갔는데도 아이들이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를 했다. 지금의 문방구 앞을 서성이다 보니 아이들이 갑자기 반으로 뚝 나눠지면서 문방구의 시끌벅적함도 사라졌겠지 싶었다. 예전 그때의 골목길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며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려졌고 어느새 아주머니는 막내가 아들이라는 말에 내 두 손을 맞잡고 엄청나게 흥분하신 듯 기뻐하셨다.
꼬물꼬물 오물오물 거리는 이상하게 생긴 아기를 처음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살짝 새어 나왔다. 이제 네가 마지막 동생이겠구나,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한다, 나는 누나이면서 욱이 이모야 라고 말해주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엄마가 출산을 하게 되면서 두 살 배기인 다섯째 동생도 집에 와있고 할머니 혼자서 힘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져 뛰기 시작했다. 어제 하교 후에 할머니와 멸치 똥을 엄청 따고 손질했었는데 저녁에 그 멸치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먹겠구나 생각하니 그제야 허기짐이 우르르 몰려오는 듯했다. 주머니에서 함께 덜컹대던 동전을 만져보며 가게에 들렀다. 설탕 뿌린 라면땅을 만들어 먹는 게 우리의 유일한 군것질거리였으니까. 라면 한 봉지를 사고 돌아서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검은 비닐봉지에 한가득 콩나물을 담아 그냥 주셨다.
"아이고, 잘됐데이, 퍼뜩 갖고 가가 잘 무치 묵고, 그라고 할매한테 억수로 축하한다꼬 또 전해도고이."
할머니께서 아마 낮에 가게에 한번 들리셨던 모양이다. 때론 간절하게 바랬던 언니가 없어서 늘 허전했지만 나부터 시작되었던 길고 긴 엄마의 고된 출산 여정이 이제 막을 내리게 된 듯하여 안도했다. 이제 우리들의 아지트, 단칸방 살이하는 이 동네에서도 딸만 다섯에서 육남매로 바뀌게 되겠지. 시골집, 원대밭 마을의 새로운 식구가 된 막내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중2, 열네 살의 나는 여전히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을 바위처럼 안고 있었다. 휘청이는 그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이 계절도 언젠가는 그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