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인, 친구, MJ

by Yonuk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부쩍 귀찮아진 게 많아졌다. 쉬는 시간이면 늘 엎드려 쪽잠을 잤고 매점에 가는 재미도 사라졌다. 담임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다. 영어 알파벳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중학교에 입학했던 나로서는 그가 1학년때 담임이 아닌 것에 감사했다. 친구들과 비교되어 위축될만했지만 학원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았던지라 학교 수업시간에 몇 배로 더 집중해야만 했다. 하교 후엔 곧장 집으로 가서 AFKN을 시청했다. 다른 기회와 선택이 없었던 내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일은 교과서를 닳도록 외우는 일이었고 본문을 소리 내어 읽고 쓰는 것이었다. 문법에 문자도 모르던 내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가득했고 빨간 기본 영어, 성문영어의 문법책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냥 읽고 말하고 쓰기만 계속했더니 언제부터인가 독해가 되기 시작했고 팝송을 따라 부르며 들리는 대로 써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했던 일들이 도움이 될 때도 많았다.


담임선생님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툭하면 삐뚤 하게 나를 쳐다보며 일어나서 발표하도록 시키셨다. 어쩌다 틀리면 그 많은 아이들 앞에서 사람 무안하게 하는 좀 딱딱한 선생님이었다. 성적순으로 우리들을 대하는 여태껏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담임이었다. 그리고 키 순서대로 자리를 정하게 하셔서 결국 나는 뒷줄에 혼자 앉게 됐는데 옆에 비어있는 책상을 교실 뒤쪽 구석에 갖다 놓으라고 하셨다. 옆자리 책상도 없고 짝꿍도 없는 상태로 새 학기를 시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다행인 건지 자리는 창가 쪽이어서 멍하게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기분이 부풀어 시를 습작하고 있을 때쯤, 반장이 특보라고 하며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욱아, 인자 니 짝꿍 생긴 데이, 좋겠네 욱이 이모!"

"......"

"아이 진짜, 뭐 이래 반응이 없노 니는? 전학 온 아가 우리 반으로 온다 안카나!"


속으로 얼마나 야호를 외쳤는지 모른다. 드디어 내게도 짝꿍이 생기는구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단정한 검은색 단발과 깊어서 푹 빠질 것 같은 동그란 눈에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거울 같은 안경을 쓴 아이가 교실로 들어와 인사를 했다. 부산에서 온 아이였다. 교실 뒤쪽에 붙여둔 책걸상을 다시 끌고 와 내 옆자리에 붙였다. 그리고 우린 짝꿍이 되었다.


쉬는 시간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인가 마음에 큰 불덩이 하나가 떨어진 듯했고 그 불이 확 터질 듯 타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넋을 놓고 멍하게 앉아있거나 엎드려 있기를 반복할 때쯤 미정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너, 넌 뭐를 좋아하노?"

"......"

"뭐 좋아하노?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거 좋아하는데......"

"......"

"니 보니까 시 쓰는 것 같던데 습작 마이 하나?"

"......"


그랬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나는 마음속으로만 대답을 하고 있었다. '어, 나도 글 쓰는 거 좋아하는데, 습작? 툭하면 하지, 우와, 니도 시 쓰는 갑네, 말이 통하겠네' 내가 답하지 않아도 미정은 계속 내게 말을 시켜보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였을까 쉬는 시간에 미정은 슬쩍 종이뭉치를 한 줌 정도 내어놓고 교실 밖을 나갔다. 엎드려 있던 나는 궁금해서 그 종이들을 끌어당겨 엎드린 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상체를 일으켜 더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아, 미정은 시인이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시어들이 온통 내 마음을 두드렸고 그런 시에 매료되어 며칠을 읽고 또 읽었다. 다 읽었으면 다시 돌려달라는 말도 미정은 하지 않았다. 우린 말없이 쉬는 시간에 습작을 했고 서로의 글을 돌려가며 읽어주었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며 작가들의 시를 읽었다. 마음속에 시원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터질 듯 타오르던 큰 불덩이도 서서히 가라앉는 듯했다. 그렇게 사춘기의 잔해들이 생각과 말과 글들에 의해 분산되는 것 같았다. 편안했다. 그냥 이대로 나는 죽어도 될 것만 같이 편안했다.


사춘기는 나름대로 조용히 지나가고 있는 듯했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미로는 여전히 어둡고 답답해 보였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지고 있었다. 우린 계속해서 쓴 글들을 각자 모아가고 있었고 주말이면 시골에 일하러 가야 했던 나를 대신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기도 했으며 그 덕분에 마음이 호강하는 날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친구였다 누가 뭐래도. 한 달에 한 번씩 자리배치를 바꾸게 했던 담임선생님의 말씀도 개의치 않았던 우리는 그냥 같이 앉게 해 주세요라고 밀어붙여가며 짝꿍이 되었다. 미정은 최상위권 성적 우수자였다. 담임 선생님 앞에 나의 말은 힘이 없었지만 미정의 말은 부탁이 되는 것을 보며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는 사춘기에 맞닥뜨린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작은 시인, 친구였다. 그 이외의 것은 그냥 공기처럼 우리를 맴돌 뿐이었다. 말이 통한다는 것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알 게 해 준 친구였다. 비로소 내일이, 매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내겐 작지만 거대하고 위대한 시인, 짝꿍, 말벗, 친구였던 미정, MJ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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