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고 아이를 하원 시키려면 이번 신호에 좌회전을 해야 한다.
"제발 나까지만 가게 해 주세요."
초초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시간을 보니, 오늘 5분 지각을 피하기 어렵겠다.
헐레벌떡 주차를 하고 계단을 두 개씩 밟고 뛰어올라 어린이집 벨을 누르니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엄마"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님께 연신 사과를 하다 신발장 앞에 눈길이 멈춘다.
역시 우리 아이의 신발만 남아있다.
" 엄마 보고 싶었어요! 노디터(놀이터) 어때?"
저녁 7시 35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을 아이에게 미안한 나는 피곤한 몸과 마음을 감추고 아이의 부탁에 기꺼이 응한다.
저녁을 준비하며 일 50점 육아 50점 , 합쳐서 백 점짜리 엄마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육아와 일,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훌륭한 엄마도 있겠지만 나는 신입 엄마가 된 후 내 생각을 현실로 이뤄내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
4년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 내 인생은 영화 에지 오브 투머로우 혹은 사랑의 블랙홀처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연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인생은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문득 생각을 했을 때부터였을까.
예쁜 아이를 얻었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곤 했지만 아이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예쁜 것 내가 낳았지, 하며 행복해했다.
아이가 17개월 무렵 전반적으로 발달이 느리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직업이 유아 발레 강사였다 보니 (이 시기에 나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 거부감 없이 비교적 빨리 센터를 데려가 언어치료도 하고 도움이 될 체험들을 골라서 시키며 거의 매일 밤 목욕놀이와 책 읽기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는 또래보다 한참 느리게,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대학병원에서는 경미한 자페 스펙트럼, 발달장애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지만 단순 발달지연일 수도 있으니 네 돌까지는 지켜보자고 했다.
병원 검사 결과 당시 40개월인 나의 아이는 거의 모든 발달영역에서 12개월 이상 느렸고 24개월 늦은 영역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죄책감이 찾아와 밑도 끝도 없이 아이가 느린 것이 내 잘못은 아닐까,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발달이 느린 아이의 육아를 하며 직업을 갖고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내게는 벅찬 굴레였고 심지어 시작한 일은 코로나로 엉망진창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나날이 우울해져 갔고 슬픔과 우울로 가득 찬 나만의 지옥을 만들어 그곳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이유도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릴 때 즈음 이러다가 차 핸들을 놓쳐버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 우울한테 언제까지 휘둘릴래?" 하는 내 안의 또 다른 외침이 들렸다.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던 나는 가장 먼저 "나"를 돌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병원의 도움을 받고자 3주나 기다려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고 무려 일 년이나 점찍어 둔 채 미뤄둔 발레학원을 등록했다.
남편에게 나의 상태와 계획을 이야기하자 아이를 보는 시간을 기꺼이 더 할애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얻어진 시간에는 내가 진행하는 수업의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글도 한번 써보기로 결심했다.
나의 이야기이자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쩔 줄 모르고 살아나가는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도 소개하고 싶다.
육아에 대해서는 아이와 나의 시간이 일정 부분 줄어든 대신 함께 있을 때 더욱 사랑을 표현해주고 놀이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았다.
나는 이렇게 나 그리고 육아와 일
이 발란스 게임에 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