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회사 소개 란에 ‘근무환경’ 으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문턱 없음”
“이 회사는 뭐 이런걸 어필해?”
사람들은 피식 웃었다.
“굳이 적어놓은 걸 보면, 문턱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한 사례가 있었나 보죠.”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하는 대수롭지 않은 마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의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교육에 참석하게 되었다.
“문턱 없는 회의실”
교육 내용의 사례로 튀어나온 문구였다.
“저.. 혹시.. 이 문턱이 제가 알고 있는 그 ’문턱‘이 맞지요?”
옆자리 참여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휠체어가 오갈수 있도록 배려한 중요한 시설이거든요.”
순간 머릿속에서 댕~하는 타종 소리가 울렸다.
살면서 불편을 겪어 보지 못하여 무지한 삶의 영역들은 얼마나 많은 걸까.
그 회사는 오죽 자랑거리가 없는 회사가 아니라, ‘장애인도 다닐수 있는 일터‘라는 위대한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였다.
몇년 전,
다리가 불편한 엄마와 여행을 도모하고 휠체어를 빌렸던 일이 떠올랐다.
멀어야 50미터,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사찰의 마당 안으로 들어가려 할때마다
불과 몇 센티의 문턱으로 인해, 몇 개의 계단으로 인해, 짧은 오르막으로 인해
힘이 모자라 낑낑거리고 사고가 날까 공포스러워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던 그 환장할 순간들.
장애인, 고령자, 비장애인,
누구나 물리적으로 정보적으로 차별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장벽을 제거하는“베리어 프리(Barrier-free)”
우리는 흔히 말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주어짐‘의 최소한의 권리 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가 있다는 것을
두 눈은 최선을 다해 보지 못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최선을 다해 알지 못한다.
요즘 나는 오른쪽 무릎이 불편하여 병원을 다니고 있다.
계단을 내려가는게 조금 아플 뿐인데도 늙어가고 있는 것 같아(아니 사실 늙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계속, 쭈욱-)내내 마음이 서러웠던 터였다.
한편으로 깨닫게 되었다.
내 육체는 점점 더 불편해 질것이며, 언제든 후천적 장애인이 될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몸은 늘 변하고, 삶은 예측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강인함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슬픔을 거두고 문턱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자.
눈에 보이는 문턱이 아니라 무심코 쌓아올린 편견의 문턱.
타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오해의 문턱.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리의 문턱까지.
그 문턱들을 조금씩 무너트릴때,
비로소 서로의 삶이 닿고, 누군가 ’들어갈수 있는‘ 장소가 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