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6

비가 올 때면 나는 - 김기웅

by 짧아진 텔로미어

비가 올 때면 나는



비가 올 때면 나는 지금 막 세워진 애기묘의 비석을 보는

시린 감상 같은 것이 나에게 있습니다.


비가 올 때면 나는,

내 인생의 전부가 잘못 친 점괘 같아 그만 어둠 속에 잠겨버리는

눈먼 마음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올 때면 나는,

이때껏 속아준 내 방황의 의미가 검은 회한으로 덩어리 져와도,

앞으로도 더 많이 속아줄 성싶은 내 행적을,

마치 취미처럼 생각해 버리는 단순함이 나에게 있습니다.


비가 올 때면 나는,

머리를 풀고 고함을 치고 춤을 추고

자꾸자꾸 외로운 그런 부산한 외로움이 있어,

영어노래 귀 아프게 울리는 어린 서민들의 다방에서

늦은 밤 텅 빈 의자들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습니다.


비가 올 때면 나는,

허술한 오만으로 보내버린 내 젊음을 불러 앉혀놓고,

검은 테이블 위에서 쓸쓸한 향연이라도...



(중략)



그리고 아직도 비가 올 때면 나는,

이렇게 자꾸자꾸 외로워지는

이 이유 없는 외로움에 알리바이라도 되어주기 위해,

난 그만 사생아가 되어 버리고 싶습니다.

그것도, 흑인의 황인의 사생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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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인 80년대 초반에 발매된 시 낭송 LP판.

그 앨범에는 임예진 씨의 어린 목소리로 낭송된 시 '비가 올 때면 나는' 이 수록되어 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다.


그 시절의 사회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

사생아, 그것도 흑인과 황인의 사생아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유난히 더 험난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시 낭송에 마지막에 나오는 웃음소리가 마치 절규처럼 느껴지는 이유,

그리고 모든 이유 없는 외로움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것은

흑인과 황인의 사생아는,

그 시절의 사회분위기에서 정체성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고

흑인의 슬픔과 황인의 한 같은 것을 동시에 물려받은 두 세상의 경계에 선

외로운 자아이기 때문일것같다.


시낭송을 들으면서

가끔 이유없이 외롭다고 느껴질때 나는 무엇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