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 11화: 심리적 전이

Dr. Transfer

by 짧아진 텔로미어

** 닥터 트랜스퍼 제 11화 입니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및 사건은 허구이며, 소설의 등장

인물 중 필명이 같은 분들은 순전히 우연임을 알려드립니다.**



제 11화: 리적 전이



병원 앞 큰길을 건너 두 번째 블록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현대식 유리 빌딩들 사이로 한때는 동네마다 하나쯤 있었던 시간이 멈춘듯한 밥집이 있다.

감성반점이라 쓰인 래된 붉은색의 간판.

그곳에서는 특이하게 식사가 끝날 즈음 인상이 좋아 보이는 주인장이 기타를 들고 나와

조그마하게 설치된 무대에 앉아 옛 노래 몇 곡을 부르기도 한다.

님들은 한때 그가 꿈꾸는 아재라는 예명으로 가수활동을 했다고 알고들 있다.

의 세상과는 달리 그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생각이 많아질 때 에 젖듯 모처럼 옛 추억에 잠겨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곳이다.


고작 5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의 응급실은 그곳과는 사뭇 다르게 이미 초겨울의 찬공기를

머금어 서늘하다. 매주 금요일 아침 8시의 응급실.

한 주 동안 내원 환자 중에서 진단과 치료가 확정되지 않은 환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다.

오늘의 환자는 2일 전에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다.

당시 환자를 진료한 전공의 3년 차 강혜O 선생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상기 환자는 저혈당을 주소로 내원한 34세 여자 환자입니다. 내원 당시...."


나는 전공의 선생의 브리핑을 들으며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본다. 2일 전 응급실 벽 세 시.

들것 위에 실린 환자가 들어온다. 응급실 천장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반사되

더 창백하 보인다. 의식은 기면상태,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을 것이다.

저혈당 증상을 의심한 공의 선생 간이혈당 검사 본다.

측정된 혈당 검사는 20~30 내외. 혼수상태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정도의 저혈당.

"50% 포도당 정맥로 주세요"

전공의 오더에 따라 간호사가 50% 포도당 용액을 재빨리 정맥에 주입한다.

기면 상태의 그녀가 빠르게 회복해서 정신이 돌아왔 것이다.

쉽게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아직 인턴 티를 벗지 못한 전공의 1년 차 김유O 선생에게서 기본적인 질문들이 나왔다

당뇨병 병력이 있는지. 당뇨약이나 인슐린 주사를 맞고 있지는 않은지..

약물에 의한 저혈당, 그런 단순한 원인이었다면 례 발표할 요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아직 경험치가 적은 의사들이다.


이름은 한유진. 나이는 서른넷 아직 미혼인 그녀.

내원 기록을 보니 지난 6개월간 이미 두 차례 같은 증상으로 내원했다.

모두 새벽 3시에서 5시 무렵의 극심한 저혈당. 론 그녀는 당뇨의 병력은 없다.


그녀는 눈을 뜨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에게 큰 병이 있나 봐요. 수술을 해서라도 낫고 싶어요."

당화혈색소 5.1로 지극히 정상범위. 하지만 혈청 인슐린 수치는 50 IU/mL 높고

혈당은 위험할 만큼 낮았다. C-peptide (인슐린이 만들어질 때 잘려나가는 부위) 수치는 애매한 정도.

전공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종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환자는 insulinoma(인슐린 분비 종양) 의증하에 검사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잠시 망설였다. 아직 진단이 정확하지는 않아 그 환자의 병을 옮기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현루 아니 최인호 환자 일 이후로 나는 환자의 눈을 본다. 환자의 눈빛은 간절하다.

진짜 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 눈빛.

결국 나는 환자의 눈빛을 믿고 진단되지 않은 병을 내 몸으로 옮겼다.

그녀는 다음 주 외래를 통해 추가 검사를 하기로 하고 오늘 퇴원했다.


이번 질환의 표적은 화창조 제약회사의 전(前) 임원, (50세) 정기호(데이비드 정)이다.

임상시험 데이터를 조작해 여러 환자를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 그는 VIP 용 건강검진을

위해 1박 2일 입원 중이었다. 병원 안에서 전이 대상에게 병을 옮기는 건 눈 감고도 가능하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에게 전이를 했다. 그의 증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

오늘이라도 저혈당 증상으로 응급실로 올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날 가 검진을 마치고 퇴원할 때까지 저혈당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병의 전이가 되기 위해서는 진단이 정확해야 한다. 인슐린 분비 종양은 의증이었을 뿐

확진된 것은 아니었다. 규칙을 깨면서까지 섣불리 전이하려고 했던 경솔함을 탓할 수밖에.

여러 번의 전이 실패로 인해 판단력이 떨어진 탓으로 돌리기에도 석연치 않았다.

왠지 조급해지고 서두르고 이러다 언젠가 큰일을 치를 것만 같은 나쁜 예감이 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꼭 틀린 적이 없었기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결국 정기호는 아무 일 없이 검진을 받고 퇴원을 했다.

일주일간 나는 평소처럼 환자를 보며 그에 대한 생각을 잊고 있다가 우연히 신경정신과

외래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았다.

정작 정신과에 가야 할 사람은 안 오고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 온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내심 궁금해졌다. 무슨 일로 왔을까?


점심시간, 복잡한 병원 구내식당의 구석자리에 겨우 자리를 잡고 식사하던 중

뒷자리의 신경정신과 선생님 둘이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하는 걸 들었다.

"오늘 OOO가 왔는데 좀 이상해. 섬뜩하기도 하고."

"정신과적인 병력은 없는데 요즘 환청이 들리나봐. 여자 아이 목소리가 자꾸 들린대."

정기호는 수일 전부터 갑작스럽게 들리는, 낯선 소녀의 말소리, 울음소리를 견디다 못해 병원에 왔다.

"아빠, 나 아파. 너무 힘들어. 병원에 데려가 줘." "삐약이도 아프대"

이음새가 튿어져 안을 채운 솜이 삐져나온, 낡은 인형을 들고 서 있는 여덟살 남짓한 여자 아이의 목소리.

그는 혼으로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현실처럼 또렷해졌다.

마치 옆에 다가와 말하는 것처럼.


밤마다 꿈속에서 그는 병실에 서 있었다.

작고 하얀 침대. 주사 바늘 자국이 가느다란 팔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그 끝에서 피가 천천히 스며 나왔다. 꿈은 섬뜩하게 반복되었다.

낮이 되어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생생해졌다.

손등을 문질러도, 바늘이 꽂힌 자국 같은 따끔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정신착란에 가까운

고통에 정신과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학적 진단도 내릴 수 없었다.


"신체적인 이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환자분의 과거의 기억이 아닌 누군가의 강렬한 감정이 투사된 것 같습니다.

일종의 심리적 전이로 보입니다."

챠트를 기록하는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심리적 전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누군가의 지독한 고통이 자신 안에 뿌리내린 느낌었다.


그 시각 나는 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차트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한유진.

그녀가 일주일 만에 또다시 저혈당으로 내원했다.

이번에는 훨씬 심각했다. 의식 저하, 경련, 호흡 미약.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던 나는 이상한 수를 확인했다.

인슐린은 60IU/mL로 높았다. 하지만 C-peptide는 겨우 0.1ng/mL미만으로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

체내에서 만들어진 인슐린이라면 인슐린과 c-peptide는 1:1의 비율이어야 한다.

인슐린을 분비하는 마찬가여야 한다.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슐린 분비 종양은 아니었다.

진단이 잘못됐으니 정기호에게 전이가 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저혈당 원인을 알아야 했다. 나는 다시 그녀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복부 쪽을 진찰하다가

나는 배꼽 옆 피부에서 얇은 주사 바늘 자국을 발견했다.


깨어난 그녀를 통해 저혈당의 원인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주입해 저혈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병이었다.

당뇨병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고 있는 부친 김성O 의 인슐린 주사를 몰래 맞은것이다.

단순한 꾀병이 아니라, 그 극단적인 행위를 통해 병을 만들어내 타인의 관심과 존재를

증명하려는 사람이었다. 뮌하우젠 증후군(Munchausen Syndrome).

뮌하우젠 증후군은 타인의 관심이나 동정을 얻기 위해 자신이 병에 걸린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로 병을 유발하는 정신질환이다.


아마도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애정이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하거나

무시 또는 방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다.

내면의 공허감, 낮은 자존감, 불안정한 자아로 인해 '아픈 나'를 통해 정체성을 느끼려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을 해치거나 병들게 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아니면 어릴 때 잦은 병원 입원으로 인해 환자의 역할에서 안정감을 느낀 기억 그리고

병원 환경에서만 자신이 보호받고 돌봄을 받았다는 무의식적 기억이 남아서 일수도 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정기호의 꿈속에서 울던 그 소녀.

그 목소리는 바로 한유진의 유년기 트라우마였 것을.

그녀가 만들어낸 병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트라우마는 실재하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병의 전이가 아닌 형태로 그 남자의 정신으로 옮겨간 것이다.


한유진 그녀에게는 전이할 육체적인 병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육체적인 전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심리적 전이를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없는 병을 옮기려 했으니, 옮겨진 건 병의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병을 만들어낸 절박한 기억과

고통이었던 것이다.


새벽 세 시, 병실은 고요했다. 모니터의 규칙적인 알람만이 방 안을 채웠다.

한유진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누워 있었다. 피부 아래로 핏줄이 가늘게 드러났다.

몸은 약에 의해 안정되어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마치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영혼처럼

나는 그녀의 챠트를 덮었다. 이제는 병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병은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돌봄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었기 때문이다.

관심을 끌기 위한 절규. 그녀가 주사 바늘을 잡던 손,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어 있던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한 표정.


정기호는 결국 폐쇄병동으로 입원하였다.

그는 여전히 한 소녀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매 순간.

"아빠, 나 아파. 숨을 못 쉬겠어…"

그의 고통은 육체의 병이 아니라, 트라우마로 덮인 타인의 기억이었다.

그는 리적 전이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반복해서 끼고 있었다.

'병을 옮기려 했지만, 나는 영혼의 감정을 옮겨버렸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디기 어려운 감정 중의 하나가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자꾸 사라지는 자신을 보는 일 같았다. 그 감정에서 도망가기 위해 쩔수 없이 선택한 거짓.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눈송이들이 병원 창문에 부딪혔다.

나는 천천히 병실을 나섰다. 소리 없이 복도를 걸었다.

나는 내가 병이라고 정의했던 것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갈증이 났다.

병원 밖으로 나와 걷는 이들 사이에서 눈 쌓인 거리를 걸었다.

발밑에 쌓인 눈이 조용히 부서졌다.

편의점에서 테라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없는 병은 당연히 옮길 수 없었으나 병의 이면에 가려진 감정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너무나 쉽게 전이되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일 뿐 외움과 우울에 고통받는다.

나는 이제 단순한 병의 전이가 아니라, 다 근본적인 인간의 고통지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마음계발이 필요한걸까? 다음 표적은 누구인가?

어떤 고통을 지닌 사람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가?

눈에 찍힌 발자국은 내 마음처럼 갈팡질팡다.

막차가 끊긴 플랫폼에서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리는 듯 막막한 심정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