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Transfer
응급실의 공기는 언제나 밤에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낮 동안은 수십 명의 발걸음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소란을 덮어주지만 밤이 되면 감춰졌던 것들이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 피비린내와 소독약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특유의 공기, 침대 시트에 배인
땀 냄새, 긴장한 숨결, 억눌린 고통이 겹겹이 쌓여 눈을 감아도 냄새만으로 응급실 구석구석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미 이 냄새에 익숙하다.
수많은 응급실의 밤을 지내온 내게는 거의 배경음처럼 늘 존재하는 공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쌓인 차트의 무게가 오늘따라 묵직하게 느껴졌다.
오늘 내원한 환자는 스물다섯 살의 여자였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열과 극심한 피로, 관절통에 시달려왔다.
며칠 전부터는 소변을 볼 때마다 생기는 거품과 손가락 자국이 움푹 들어갈 정도의 하지 부종이
심해져 내원했다.
Malar rash (양쪽 뺨에 생기는 나비 모양의 발진)는 마치 얼굴 위에 붉은 나비가 날개를 펼치고
앉은 듯했다. 검사 결과 루푸스 항체 양성, 보체 수치 감소, 단백뇨 3+. 병은 이미 신장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진단명은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SLE).
이 질환은 자가면역질환의 하나다. 자신을 보호하던 면역체계가 되레 자신의 세포와 조직을 공격해
여러 장기에 염증을 일으킨다.
피부, 관절, 신장, 심장, 폐, 신경계 — 전신의 장기를 무차별적으로 침범하는 잔인한 병이기에
이름 앞에는 ‘전신성’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녀는 사회복지사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고, 지금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그녀를 "천사 언니", "천사 누나"라 불렀다.
그것만 보아도 직업 이상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들고 어렵게 사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네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눈빛이 허공을 떠돌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목 맥박을 재며, 그 병을 내 몸으로 옮겼다.
이 병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찾아와서는 안 되는 병이었다.
이어서 내원한 환자는 마흔두 살의 남자였다. 우리 병원 응급실에 여러 차례 내원했던 환자다.
매번 또래의 같은 남자가 함께 오는 것으로 보아 성소수자 커플일 것이라 짐작했다.
HIV 감염자로 수년간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CD4 수치 50 미만. 그의 면역체계는 이미 껍데기뿐이었다.
여러 번 기회감염으로 쓰러졌다가 간신히 회복하기를 반복하던 그는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말기 환자였다. 병원체와 싸우는 병사가 사라진 전쟁터 같은 몸으로 그는 다시 응급실에 내원했다.
둘 중 하나의 질환만으로도 사람의 삶은 충분히 파괴된다.
하지만 오늘의 표적에게는 두 가지 병 모두를 전이시키고 싶었다.
이전에도 두 질환을 한 번에 옮긴 적이 있었고, 이후 타겟이 두개의 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쾌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병까지 내 몸으로 옮겼다.
표적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인물이다.
이 병원의 병원장, 이호석.
내과 과장이었다가 3년 전 병원장 자리에 올랐다.
물론 동료 의사에게 병을 옮기는 일에 대해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응당한 일이다.
그는 내과 과장 시절, 간호사와 전공의들을 수차례 성추행했다.
고소한 이들을 무고죄로 역고소해 피해자들이 병원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 중 한 명은 끝내 삶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
해외 의료봉사 중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 나라 망신, 병원 망신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의 딸이 서울의 명문 의대에 들어갔다며 은근히 자랑하던 날,
나는 속으로 '당신 딸이 의대에 가서 꼭 당신 같은 인간을 만나길 바란다'고 저주했다.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이 맞다. 나를 보면 알 수 있다.
병원장 승진 과정에서도 잡음이 많았다.
비열한 방식으로 경쟁자를 몰아냈다. 정치꾼으로서의 자질이 충만해, 언젠가 정치판에 발을 들일
가능성도 높다. 백번 양보해 그것으로 끝났다면, 나는 이 두 질환을 함께 옮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약사와 결탁해 환자의 동의 없이 신약 임상시험을 진행했고,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통계에서 삭제했다.
병원 매출을 위해 불필요한 시술을 강요하고, 환자 정보를 외부로 흘렸다.
그의 서명 아래에서 누군가의 삶은 늘 짓밟히고 무너져갔다.
그럼에도 그는 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기자 앞에서도, 동료 의사들 사이에서도, 환자와 가족 앞에서도.
부드러운 말투와 온화한 인상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 위선적인 미소를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이 자로 인해 망가진 삶의 고통을 대신하기엔 하나로는 부족하다."
나는 결심했다. 오늘은 두 질환을 동시에 옮겨 심판을 내릴 것이다.
응급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마가 찢어진 술 취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교통사고로 실려온 여자는 산소마스크에
의존해 간신히 숨을 쉬었다. 심정지가 온 노인은 이미 심폐소생술 중이었다.
두 환자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다.
내일 전이에 성공하면 그들은 회복될 것이다.
전이는 늘 간단하다. 내일 오전 병원장과의 회의 시간,
출력한 발표물을 건네며 그 금빛 시계가 걸린 손목에 스치듯 닿기만 하면 된다.
아마 내 의지가 강하니 0.001초의 접촉에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과장님이 환자분들 치료를 너무 잘하시나 봐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응급실 내원 환자 수가 줄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뜻이다.
실제로 전이로 환자들에게서 병이 사라진 후 재방문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전이는 언제나 찰나였다.
질환은 아무 느낌 없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지만, 그 순간부터 타겟의 몸은 새로운 숙주가 된다.
곧 그는 몸부림치며 쓰러질 것이다.
발열과 쇼크, 무력감, 그리고 모든 기회감염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때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오늘 응급실 내원 환자 수에 +1만큼 기여하게 될거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그날, 두 환자의 병세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허공을 응시하던 루푸스 환자의 눈이 반짝였고, 양쪽 뺨의 붉은 나비도 사라졌다.
혈액과 소변 검사 수치가 하루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옆 침상의 환자도 염증 수치가 떨어지고 컨디션을 회복했다.
동행했던 남자와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사랑의 힘은 대상을 막론하고 언제나 위대하다.
이제 병원장이 응급실에 내원하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병원 식당에서 마주친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Malar rash는 보이지 않았다.
전이 후 3일째 되는 내일, 병원 과장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회의 내내 나는 병원장의 얼굴과 몸짓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멀쩡했다. 나 역시 증상이 없었다.
이전엔 얼굴인식장애와 카푸그라 증후군을 함께 전이에 성공한 적이 있었기에 확신했지만
이번은 달랐다.
원장은 아무 증상 없이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악행을 계속했다.
최근 들어 전이 양상은 복잡해졌고,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났다. 더 이상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국 이번 전이는 실패였다.
정확히 말하면, 두 환자의 증상이 좋아져 내 몸으로 전이된 것은 맞기에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내 몸에서 전이가 멈췄거나, 타겟의 몸에서 발병하지 않았거나.
오늘은 간만의 오프였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무겁고 불편했다.
나는 나만의 공간에 숨겨둔 중고등학교 시절의 실험노트를 꺼내 읽었다.
최근 복잡해진 전이 양상에 대해 새 노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까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이번 전이에서 내가 간과한 것을 깨달았다.
두 질환은 모두 면역체계의 문제였다. 하나는 면역의 과잉, 하나는 면역의 결핍.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의 과잉 면역 반응은 애초에 면역세포가 텅 빈 몸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
반대로, 에이즈의 면역 결핍은 루푸스의 과도한 면역 반응 속에서 오히려
면역력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서로 다른 두 괴물은 동시에 목을 물고 늘어져 결국 함께 질식한 것이다
1+1=0.
증상도, 고통도 없는 완전한 중화.
그 다음날에도 병원장과 마주쳤다.
마스크 속에서 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이유와,
그의 몸속에서 두 개의 치명적 질환이 충돌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악을 응징하려 했으나, 오히려 정의가 닿지 않는 공백이 생겼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의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또 점차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전이의 양상에 대한 패배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질환으로 심판을 하겠다던 나의 과욕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