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Transfer
폭풍처럼 한바탕 환자들이 몰아치고 간 새벽 세 시 삼십 분의 응급실. 모두들 물 젖은 솜처럼 의자에
축 늘어져 있다. 중환자는 없었어도 경증의 환자를 여러 명 보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단 30분만이라도 환자가 안오길 바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 사이에서 아직 전이할 질환을
결정하지 못한 나만 환자를 기다리고 있다.
정적을 깨고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 '중환자다'. 왠지 느낌이 온다.
응급실 문이 열리자 타일 바닥을 긁는 파열음을 내며 카트가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은 흡사 물에 빠진
사람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퍼렇게 변해 있었다.
"호흡곤란, 흉통, 갑작스러운 실신!" "산소포화도 68, 혈압 80에 50! 의식은 기면 상태입니다."
40세 남자. 이름은 이도하. 젊은 사업가이자 선행으로 유명한 기업인. 신문에도 미담으로 몇 번
얼굴이 실려 대부분 직원들이 알 정도인 유명인사다. 심전도는 큰 이상이 없었으나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져 있다. 우측 다리가 벌겋게 부어 있는 걸 보니 다리의 심부 정맥에서 떨어져 나온 혈전이 폐동맥을
막았다는 직감이 왔다.
"동맥혈 채취, D-dimer 검사! 헤파린 시작하겠습니다. 흉부 CT 찍어주세요." 오더에 맞춰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이 움직였다. 진단은 예상대로 급성 폐색전증이다.
다리에 위치한 깊은 부위의 정맥에 혈전이 생기고 이것이 우심방, 우심실을 경유하여 폐의 혈관을 막아
생기는 질환이다. 선행을 실천하는 이런 사람이 병으로 고생을 해서는 안될 일이다.
길을 잘못 든 이 병의 방향은 내가 정할 것이다.
그의 손목을 잡고 눈을 잠시 감았다. 내 몸으로 옮겼으니 이제 타켓에게 전이하면 된다.
중환자실로 가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밤 안으로 서둘러 이 병을 옮겨야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 둔 이름이 몇 있다.
그중 한 명인 강백진. 불법 사채놀이를 하며 폭력, 협박을 일삼는 자이다.
그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은 언제나 음지였다.
몇 해 전 응급실에서 칼에 찔린 그를 치료한 적이 있다. 여전히 나쁜 짓을 일삼는 그의 이름을
마음 한쪽에 접어두었다. 언젠가 다시 펼쳐야 할 쪽지처럼.
그날 밤 나는 병원 뒤 계단을 내려와 택시에 올랐다. 큰길 네온이 끊기는 지점에서 내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가 운영하는 지하 술집의 문에 붉은 간판의 불빛이 비춰 붉은 핏자국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강백진이 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선생 왔네!. 술 한잔 거하게 드시려고?"
실패했지만, 이전에 전이를 시도하러 몇 번 그의 술집에 간 적이 있어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그가 말을
던졌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술을 한잔 시키고 은밀하게 손가락으로 술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건배하며 그와 술잔을 세게 부딪쳤다. 찰랑거리는 내 술잔의 술이 그의 얼굴과 입술에 튀었다.
내 손이 담겼던 술 한 방울 그걸로도 충분하다. 전이는 끝났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잔을 비웠다.
한두 잔 더 마시고 나는 일어섰다. 오늘 할 일은 다 끝냈다
이제 환자 이도하의 증상이 빠르게 회복 되는 일만 남았다.
기대와는 다르게 그 다음 날 아침 응급실 도착하자마자 호출 벨이 울렸다. 중환자실이었다.
이도하의 산소포화도가 급강하했고, 혈압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코드 블루"
30분 넘게 심폐소생을 했지만 심전도는 파형을 잃고 일직선으로 바뀐 채로 변함이 없다.
사망 시각 08시 47분. 사망 원인, 급성 폐색전증. 사망진단서에 작성하는 내 옆에서 레지던트가 말했다.
"혈전용해 치료를 했는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행이 됐을까요?"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폐색전은 순식간에 악화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당혹스러운 건 오히려 나였다.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전이에 성공했는데 왜 이 환자가 죽은 거지? 진단이 잘못된 걸까?
어제 술잔을 통한 전이에 실패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D-dimer의 상승, CT에서의 혈전이 확인되었으므로 오진 가능성은 없다.
이전에도 손가락을 담근 술 한 방울을 통해 전이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이가 안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뭘까? 내 몸으로 안 옮겨진 걸까? 그 가능성도 없다.
눈 감고 내 몸으로 옮긴다는 생각을 하고 접촉을 해서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확인해야 하는 건 강백진을 관찰해 그에게 병이 생기는지 아니면 3일이 지나서 내 안에서 병이
진행될지 지켜봐야 한다. 그날 장례식장에는 검은 차림의 사람들과 화환이 가득했다. 리본에는 '추모',
'존경'이라는 단어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기자들이 몰려와 치료에 대한 질문을 반복했다.
언론에서는.'의료 사고 가능성' '비극적인 사망', '젊은 사업가의 안타까운 죽음,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마구 쏟아냈다.
그 시각 강백진은 멀쩡했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활력이 넘쳐 보였다. 길에서 부하들과 웃으며 활보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전이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놓친것이 있는 건가.
3일 후에도 강백진도 나도 발병의 기미는 없었다. 모든 궁금증은 그 다음 날 저녁이 되서야 풀렸다.
그 다음 날 저녁, 병원 메일함에 익명의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이도하의 민낯입니다"
첨부파일을 열자 사진과 문서들이 쏟아졌다.
장학재단 약정서에는 '장학금 수혜자는 필히 소액대출 시행함'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대출 계약서에는
'연체 시 보호자에게 통보, 담보로 부동산 및 급여 압류' 가 적혀 있었다. 피해자 가족의 녹취록 속
목소리는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 장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는데 매달 독촉장이 와요."
"보복이 두려워 그 동안 아무 말도 못했어요"
봉사활동 사진 속에서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뒤편 학생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겉으로는 기부 천사였던 그는, 뒤에서는 대부업과 협박, 금융사기의 배후였다.
교회 강단에서 성공 철학을 강연하던 목소리는 실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덫이었다.
봉사활동도 개인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나는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악인보다 더 악랄한 자를 내가 살리려 했던 것인가.
전이는 어쩌면 스스로 방향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판단해 더 나쁜 사람의 질환의 전이를
거부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또 하나의 규칙이 생겼다. 악인의 죄는 내 몸에 심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그가 악인인지 알 수 없으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며칠 뒤, 익명으로 신문사에 이도하에 대한 제보를 했고 언론은 연일 그의 실체를 폭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피해자들이 증언했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며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이미 세상의 판단은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전이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어떤 날은 환자가 살아남고, 어떤 날은 죽을 것이다. 어떤 날은 악인이 쓰러지고, 어떤 날은 멀쩡하다.
모든 것이 내 의지대로 결정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치 나의 오만에 대한 경고 같았다.
결국 나도 누군가 그린 큰 그림 속에서 한낮 전이의 도구일 뿐인걸까?
퇴근길, 병원 앞 전등이 나간 자판기는 어둑 컴컴하다.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나는 그 캔을 들고 잠시 서 있었다. 복도 끝에서 자동문이 열리고 닫혔다. 나는 다시 걸었다.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머릿속은 소란스러웠다.